<밤 산책> 손구용 2023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흑백이라고 하기엔 창백한 푸른 색이 감도는 밤풍경 위로, 미니멀한 산수화처럼 느껴지는 손그림과 오래된 시구를 적은 손글씨가 등장한다. 다분히 '명상적'이라 부르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는 <밤 산책>의 이미지들은 얼핏 '영상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밤 풍경을, 그것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개울가의 물과 그것에 비친 가로등 불빛, 달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구름의 흐름, 담벼락 옆을 지나쳐 걸어가는 고양이, 점멸을 반복하는 가옥의 불빛과 같은 것들.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이라면 그것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은 이 영화와 같을 것이다. 모든 움직임이 포착되는 밝은 대낮의 산책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멈춰버린 밤의 시간 속에서 생동하는 움직임들을 이 영화는 담아내려 한다.
<뿌리이야기> 김광인 2023
이른 아침, 건설노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일터로 나간다. 칸막이 진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보도블럭을 새로 깔고, 건물이 올라갈 터를 닦는다. 5분가량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감독이자 한 명의 건설노동자인 김광인의 노동현장들을 담아낸다. 와이드스크린에 광각으로 담긴 노동의 현장은 그곳의 추위와 더위를, 흙과 벽돌의 냄새를 스크린 바깥으로 뿜어낸다. 영화의 주인공 승태는 호주로 이주할 예정이다. 살던 집을 정리하고 어머니 집에 머무르며 목공 일을 배우는 그는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착실히 준비한다. 낮선 곳으로 이주하려는 그는 함께 노동했던 동료들을 찾아가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뿌리이야기>의 이야기는 그것이 전부이다. 오랜만에 재회한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먼저 떠나간 동료를 추모하며 그가 작업한 보도블럭 위에서 셀카를 찍으며, 한국에 머무를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낼 이들을 찾아 나선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뿌리이야기>의 순간들은 평범한 시간들의 반복 그 자체를 동력으로 삼는다. 낯선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의 불안감이나 헤어질 사람들과의 아쉬움 같은, 소재만으로 떠올릴 법한 정념들은 이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스쳐지나간 대사처럼 "서로 몸 비비고" 노동해온 동료들의 기억을, 무수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갈 견고한 보도블럭처럼 자신의 토양이 되는 시공간에 시공한다. 승태에게 침을 놔주던 중국동포 동료 아저씨는 의술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아픈 나무를 땅에 심어 정기를 빨아들이게끔 하는 것". 새로운 땅으로 향할 청년 노동자는 자신의 땅을 떠나기 전 그 정기를 빨아들이는 만남의 반복을 수행한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다시 등장하는, 시공이 완료된 오프닝 시퀀스의 노동현장들과 그 위로 유령처럼 디졸브된 노동자의 모습은, 우리가 밟고 서 있는 공간에 무엇이 함께 새겨져 있는지를 되새기게끔 한다.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 민아영 2023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벌어지던 2021년 12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이동권을 비롯해 여러 장애인 인권 관련 의제를 두고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활동을 통해 각 후보자들에게 장애인 인권 관련 공약을 요청한다. 주된 요청 대상이었던 네 후보 중 한 후보만이 관련 공약을 내놓지 않았고, 그가 당선되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운동은 이 영화가 상영된 서울독립영화제 기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처음 시작된 2001년부터 지금까지의 맥락을 훑는다. 이동권 보장이 왜 시민권과 직결되는가, 이동권 투쟁의 형태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얼핏 이동권과는 관련 없어 보이는 탈시설 등의 장애인 인권 의제들을 왜 함께 외치게 되었는가. 故박종필의 <버스를 타자! :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가 나온지 21년이 흐른 지금도 장애인들은 여전히 지하철에서 투쟁을 외친다. 영화는 그들이 투쟁의 현장에서 몸소 겪는 반동을 기록해낸다. 이것은 투쟁의 기록이자 혐오의 기록이며, 성취의 기록이자 퇴보의 기록이다. 올해의 한 인터뷰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는 "이 투쟁은 비장애인에게 주는 선물이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들의 투쟁은 선물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더 많은 이들에게 제도의 헤택을 돌리며 모두의 생활을 조금씩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그 선물을 쓰레기통이 집어 던지려는 이들은 누구인가? 적어도 지하철에서 살갑게 <시민 여러분, 반갑습니다>는 인사를 건내는 활동가들은 아닐 것이다.
<여공의 밤> 김건희 2023
영화는 1940년에 촬영된 시미즈 히로시의 기록영화 <경성>에서 시작한다. 식민지 조선 경성의 모습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조선총독부의 의뢰를 통해 제작된 것으로,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감독은 이 영화에 담긴 여성들, 어린 소녀부터 할머니에 이르는 무수한 얼굴들에 주목한다.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렇다면 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여공들이 영등포의 방직공단으로 강제동원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찾아온 변화는 기존의 여공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여공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여공의 밤>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익명의 여공들을 쫓는다. 아카이브 속 기록영화의 이미지를 가져오고, 그곳에서 오랜 세월 자영업 해온 이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기도 하며, 당시 여공으로 강제동원 되었던 이의 구술을 담아내기도 한다. 거대한 백화점과 복합쇼핑몰이 들어선 영등포의 지금은 과거의 순간을 완전히 청산해내려는 것만 같다. 다만 <여공의 밤>은 자신이 담아내려던 포부를 온전히 보여주는 데 실패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비는 대비 그 자체에만 머물며,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하나의 아카이브로 구축되지 못한다. 어쩌면 <경성>에 담기지 못한 어떤 얼굴들을 떠올렸다는 감독의 자막부터, 다분히 자의적인 연결로부터 이 영화가 출발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기록되지 못한 것을 역추적해나가는 다큐멘터리는 이미지를 발굴하고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그것을 되살리는 행위다. <여공의 밤>은 그 재료를 충분히 역사화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곳에 발견되지 못한 역사가 숨어있음을 표시해줄 뿐이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마의, 박수남 2023
난치병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박수남은 오랜 기간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카메라에 담아 왔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그는 학창시절 조총련 활동가가 되었으며, 강제징용/징집된 조선인, 원폭 피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의 목소리를 꾸준히 담아낸다. 그는 1958년 재일 조선인 이진우가 또해 여자 고등학생을 살해한 코마츠카와 사건을 취재하며 본격적으로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펜으로 이야기를 적던 그는 그것에 다 담기지 않는 목소리를 담기 위해 녹음기를, 목소리에 다 담기지 않는 몸짓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게 된다. 영화 초반부 영화의 공동감독이자 딸인 박마의와 다투는 장면에서 박수남은 카메라 담긴 것을 볼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카메라이자 영화라고 말한다. 자신이 카메라-눈(키노-아이)라는 지가 베르토프의 선언이 다분히 '영화'적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면, 자신이 곧 카메라라는 박수남의 호통은 목격자이자 기록자인 자신 자체가 영화임을 선언한다. 박수남에게 영화는 촬영된 실재를 상상계로 조작해내는 것이 아니라, 실재계 그 자체다. 자신의 기억력이 상당하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영화 말미의 말은 <되살아나는 목소리>라는 영화가 박수남(과 그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의 상황을 반영하듯 영화는 갈수록 심도를 옅게 잡는 촬영과, 종종 박수남을 포커스아웃하는 화면을 보여준다. 그럴수록 두 감독이 되살려내는 목소리와 이미지들, 박수남이 오키나와와 군함도, 히로시마와 도쿄, 대구와 서울 등지에서 촬영한 이미지들은 열화되어가는 필름의 물성을 이겨내고 관객들 앞에 선명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기억력이 대단하다는 박수남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이미지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증거할 뿐 아니라 '박수남=영화'라는 등식을 증거한다.
<신생대의 삶> 임정환 2023
민주는 실종된 남편을 찾아 리투아니아로 떠난다. 그가 남긴 편지가 리투아니아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는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오영과 그의 예비남편 준화를 만난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남편을 찾는다는 민주의 목적은 다른 방향으로 굴절된다. <신생대의 삶>은 끝없이 인물들의 역할을 바꿔간다. 세 인물은 어느샌가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갑작스레 인터폴과 그들의 추격을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하며, 연인이었다가 타인이 되기도 한다. 살던 곳을 벗어나 머나먼 타지로 향한다는 것은, 그것이 잠시간의 여행일지라도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곳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코스모폴리탄의 정체성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생대의 삶> 속 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이 거기에 있다. 이는 영화 자체의 성격과도 연관되는데, 이 영화는 인물들의 역할바꾸기만큼이나 자신의 장르를 바꿔간다. 익숙한 '한국 독립영화'처럼 출발한 영화는 갑작스레 경찰물이 되었다가, 미스테리를 거쳐 로맨스로, 다시 그것들이 씬마다 바뀌는 후반부로 이어진다.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영화의 성질이 무엇을 향하는지 읽어내기는 어렵다. 아니, 이 영화가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러닝타임이 끝날 때까지 발견하기 어렵다. 어느샌가 리투아니아를 찾은 목적을 잃어버린 민주처럼, <신생대의 삶> 또한 자신이 하고자 한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정해내지 못한 것처럼 다가온다. 결과값에 대한 가설 없이 진행되는 실험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청춘(봄)> 왕빙 2023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중국의 노동자 지구 리밍의 청년 노동자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10대 중반부터 20대 중반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상하이 인근의 리밍에서 돈을 벌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이들이다. 화면에서조차 한기가 느껴질 정도의 열악한 건물, 위생 및 편안과는 거리가 먼 기숙사의 풍경, 영업장-노동공간-기숙사라는 위계화된 구조, <비터 머니>에 이어 재차 리밍으로 향한 왕빙의 카메라가 담아내는 풍경은 여전히 황량하다. 다만 이 영화는 '청춘'이라는 제목처럼 그의 영화 중 가장 생기넘치는 영화다. 미싱공장이라는 환경에 놓여 있지만, 이곳에 모인 청년들은 마치 기숙학교에 막 입학한 학생들처럼 행동한다. 공장과 기숙사는 노동과 임금협상의 현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구애와 연애, 장난과 우정, 얼핏 철없게도 느껴지는 과시욕과 사사로운 대화들로 채워진다. 212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왕빙은 그들의 삶을, 모든 것이 시들어버릴 것 같은 풍경 속에서 각자의 생기를 싹틔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몇 군데의 공장을 병렬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눈에 들어오는 얼굴과 이름이 있지만, 영화는 한 개인 혹은 한 그룹을 영화의 중심으로 삼지 않는다. 사실 영화가 보여주는 공장들의 모습이 대동소이하기에 노동자의 얼굴로서 각각의 공장이 구별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들)을, 그저 보여준다. 그것이 <청춘(봄)>만이 가진 독특함은 물론 아니다.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는 다른 영화와 이 영화 사이의 차별점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대부분의 노동자가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종종 카메라의 존재를 제스처와 말로 표현하는 이들이 반복을 깨고 인상을 남긴다. 그 순간 왕빙의 카메라는 노동자들을 따라 움직이는 유령에서 외부인의 지위로 튕겨져 나간다. 편집되지 않고 담긴 그 순간들은 이 영화 혹은 이와 같은 '리얼리즘'의 형식이 지닌 어떤 불가능의 지점을 찰나에 드러낸다. 나이가 있는 여성 노동자들을 뒤쫓는 짧은 장면은 해당 장면 내내 노동자들이 카메라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 지점을 전면화한다. 카메라는 공장 노동자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최종적으로 대상과 불화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모든 일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던 이들은 어떤 결정적 순간에는 문을 닫고 들어가거나 행동하기를 주저한다. 왕빙이 그 순간들을 잘라내지 않고 담아낸 지점에 주목하며, 3부작의 나머지 두 영화를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