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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07. 2024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후기

<말께리다스> 타나 길버트 2023 

칠레의 교도소 내 아이를 가진 수감자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아이를 밖으로 보낼 것인지, 감옥 안에서 양육할 것인지. <말께리다스>는 감옥에서 아이를 기르기로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이는 수감자와 함께 감옥 안에 갇힌다. 감옥 바깥의 유치원을 다니는 대신, 다른 수감자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장한다. 영화는 그 순간들을 수감자이자 어머니인 이들이 휴대전화로 촬영한 저화질 이미지들로 구성된다. 많은 제약 속에서 감옥의 어머니들과 아이들은 그들만의 사적인 시간을 함께한다. 간수 몰래 촬영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감옥’이라는 제약의 공간을 재현한다. (히토 슈타이얼을 따라) <말께리다스>의 ‘빈곤한 이미지’들은 이미지 자체의 열악함을 포함한 채 감옥 바깥으로 유통되면서 사적인 순간들의 ‘동맹’이랄 것을 형성한다. 몰래 들여온 휴대전화로 촬영된 그들의 사생활은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박탈당한 공간인 감옥을 역동적인 삶의 공간으로써 담아낸다. 

<럭키, 아파트> 강유가람 2024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는 가까스로 아파트를 장만했다. 다리를 다친 선우는 일자리를 잃었고, 대출 이자를 떠안은 희서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한편 희서는 기독교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선우와의 관계를 이야기하지도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랫집에서 발생한 고독사 사고로 인해 악취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오랜 기간 노동, 여성, 퀴어 등 여러 소수자/사회 문제를 다큐멘터리로 다뤄온 강유가람 감독의 첫 극영화다. <럭키, 아파트>는 감독이 그간 다뤄온 노동과 성차별, 퀴어의 삶, 길고양이 등을 부동산이라는 또 하나의 첨예한 문제와 함께 엮어낸다. 너무 많은 문제들이 두 주인공 위로 쏟아져내린다는 지점에서 얼핏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무수한 문제들 속에서 씨름하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 아파트에서의 여러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선우와 가족/회사에서 숨쉬듯 벌어지는 차별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희서 사이의 대립을 보며,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적으로 응원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 견뎌내는 삶이 미련한 것도 아니고, 문제를 돌파하려 애쓰는 삶이 민폐인 것도 아니다. 과거이자 지금이며 미래일지 모르는 순간들을 두 주인공은 살아간다. 남들은 애써 무시하는 냄새를 맡는 예민함은 그 시간을 지켜낸다. 

<양양> 양주연 2024 

감독은 술취한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40년 전 죽은 고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족들은 고모의 존재를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다. 평범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한 감독은 고모의 자살과 그것을 다른 가족에게 숨긴 이유를 궁금해 한다. 감독은 의문을 직접 풀기 위해 고모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을 찾아 나선다. 감독은 고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간 한예종 청소노동자 투쟁, 5.18 광주민주항쟁에 참여한 여성 등을 다큐멘터리에 담아온 그는 그들의 모습이 고모 같이 느껴졌다고 말한다. 집에서는 전형적인 정상가족 내 ‘딸’ 역할에 충실하지만, 집 밖에서는 여성인권을 외치고 투쟁하는 자신 사이의 괴리를 느끼기도 한다. 감독은 고모의 흔적들, 사진, 읽었던 책, 주변인들의 증언, 공문서 등을 탐색한다. 감독은 결국 죽음의 진실을 발견한다. 데이트폭력의 피해자로서 죽음을 맞이했음을 알게 되었고, 집에서 발견되었다던 아버지의 말과 달리 남자친구의 집에서 죽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감독은 어린시절부터 은연 중에 느껴왔던 남동생과의 차별대우부터, 성인 이후에 목격한 차별•투쟁•사건들을 떠올린다. 감독의 끈질진 조사는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하나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지워진 고모의 삶은 여성이 하나의 인격적•사회적 주체로 다뤄지지 못해왔으며, ”회목한 가정”이라는 명명과 분위기 속에서 숨죽이고 살아가야 하며 가족의 명예를 위해 지워질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은 여전히 발생하는 상처와 죽음들을 통해 드러나듯, 여전히 잔존하는 관념으로서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양양>은 우연히 접한 가족사를 통해 그 결론에 다가선다. 나아가 감독은 이 결론을 들고 가족에게 향한다. 가족 안에서 지워졌던 ‘양지영’이란 이름은 <양양>이라는 영화를 통해 복권된다. 

<서신교환> 김현정 2024 

극영화 감독인 소형은 폐광 예정인 탄광촌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형부의 요청을 받고 촬영을 돕는다. 촬영보조이자 작가로서의 일을 요청받은 소형은 극영화 현장과는 다른 다큐멘터리 현장에 적응하기 어려워 한다. 무언가 결정되고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촬영자 개인이 무엇을 찍을지 다소 직감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상황, 소형은 자신이 찍은 것이 ‘쓸모있는’ 이미지인지 쉽사리 판단내리지 못한다. 인터뷰나 노동현장의 촬영분을 보며 감독의 ‘주관적 시선’이나 ‘감정적 개입’을 논의하는 부분은 영화를 대하는 다소 상반된 태도를 담아낸다. 대상을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소형과 대상과 참여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형부가 대립하는 장면은 서로 간의 이해할 수 없는 거리를,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탄광촌 노동자 해숙과의 만남은 소형을 변화시킨다. 대상을 관찰하기만 해서는 발견할 수 없는, 참여의 과정에 수반되는 새로운 시야가 소형의 가치관을 변화시킨다. “대상을 찍는다”는 행위는 모든 영화에 있어 동일할지라도, 어떻게 찍는가는 모든 영화가 다르다. <서신교환>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려고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영화이며 영화로 무언가를 대할 때의 태도에 관해 영화는 고민하고자 한다. 

<정의되지 않는 것들> 마리아 아파리시오 2023

영화편집자 에바는 조수 라미와 함께 시각장애인에 관한 영화를 편집한다. 그러던 중 영화의 감독이자 친구 후안이 세상을 떠난다. 영화학교 학생들에게 '기록 매체로서의 영화'와 그것이 지니는 모종의 순수성에 관해 열변을 토하던 에바는 점차 의욕을 잃어 간다. 마리아 아파리시오는 그러한 에바의 상황을 영화(들)과 엮어낸다. 이 과정이 사뭇 흥미롭다.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종종 이미지와 사운드를 별도의 존재로 다루기도 하고, 에바가 편집하던 후안의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화들의 존재를 언급(종종 보여주기도)한다. '영화'가 하나의 기록이기 위해, 혹은 기록이 하나의 영화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구성요소들이 하나의 영화, 그리고 에바가 손대고 있는 영화 안에서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이는 갑작스런 친구의 부재를 소화하는 영화적 방식임과 동시에 언제나 과거의 기록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기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에바는 자신이 편집하던 후안의 영화 푸티지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이들을 우연히 마주한다. <정의되지 않는 것들>은 그 우연한 만남의 아름다움에 자신을 맡긴다.

<아키텍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2024

영화는 몇 개의 상황을 축으로 삼는다. 이탈리아 건축가 미켈레 드 루치는 자신의 집 마당에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매직 서클'을 만들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과 재난 등을 이유로 파괴된 건물들과 그 철거 현장이 등장한다. 동시에 영화는 오래된 고대유적과 그곳의 관리인을 담아낸다. 이 장면들을 서로 교차되며 등장한다. 조경 공사를 진행하는 인부들과 건축가의 대화, 무너지고 폭파되어 무너져내리는 건물과 돌무더기의 소음, 고대 유적 관리인이 노동하는 소리, 이들은 하나의 교향곡처럼 영화를 채워낸다. <아키텍톤>과 미켈레 드 루치가 제기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천 년을 버티는 건축물을 만들 줄 아는데, 왜 콘크리트로 4~50년 밖에 못 사용하는 건물을 짓는가?" 영화는 현대의 건축이 자아내는 환원 불가능성, 파괴되면 그저 폐기물이 될 뿐인 콘크리트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는 돼지 농장을 담은 전작 <군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 영화에서는 건축물과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들, 행위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물론 <아키텍톤>의 어떤 장면들, 특히 무너져내리는 콘크리트 폐기물들을 부감으로 담아낸 장면들이나 파괴된 도시를 철거하는 장면을 (드론을 사용한) 수평 트래킹으로 잡아내는 장면들은 영화의 주제와 달리 파괴의 현장을 탐미적으로 담아낸다. 이는 영화의 내적 불일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이든 건축가가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탄식하며 꺼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오색의 린> 이원우 2024

2010년, 청계광장 인근에서 새 카메라를 테스트하던 감독은 관광마차를 끄는 말들을 발견한다. 말들은 왜 도로 위에 있을까? 말들은 도로 위에 배설하면 안 되기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노동한다. <오색의 린>은 여기서 출발한다. 오랜 시간 인간의 교통수단이자, 인간을 위해 노동하는 동물이었던 말은 점차 우리의 생활권 바깥으로 이동했다. 말을 볼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공간은 경마장이 되었다. 영화는 말과 관련한 여러 주체들을 다소 산만하게 풀어놓는다. 말의 다리가 자동차와 기차의 바퀴로 대체됨으로써 바뀐 풍경과 시야에 관해, 즉 말의 '매체성'이라는 것이 한 측면에 놓인다. 또 다른 측면으로, 운동하기 위해 걷고 달리는 감독은 말의 걷기/달리기가 운동인지 노동인지를 고민한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규격에 맞지 않아 사라졌음에도 공권력에 의해 동원되곤 하는 말, 그리고 역시나 '규격 외'로 분류되며 도시의 흐름에서 폭력적으로 배제되는 어떤 이들의 이동권에 관해 생각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촬영된 여러 이미지들이 80분을 채우며 '말'의 이미지에서 촉발된 사유들을 풀어낸다. <오색의 린>에서 이원우의 카메라는 많은 경우 아래를 향한다. 아스팔트 도로 위를 걷고 뛰는 사람의 발들, 다리 달린 존재들을 밀어내고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들. 전설 속 동물인 '기린'은 벌레를 밟아 죽이지도 자라나는 풀을 밟지도 않으며 함정과 그물을 모두 피해간다고 한다. 영화는 이를 몇 번 반복하여 들려준다. 많은 이야기들을 오가는 것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지만, <오색의 린>은 확실한 하나의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누구도 밀어내지 않고 함께 밟을 수 있는 땅이, 기린이 밟을 수 있는 땅이 지금 우리에게 있을까? 

<사건> 빌 모리슨 2023

2018년 7월 14일, 동네에선 '스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미용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경찰은 그가 총을 꺼내들었다며 정당방위를 주장한다. 빌 모리슨은 CCTV, 블랙박스, 경찰의 바디캠 등 사건 당시를 기록한 여러 카메라의 이미지를 끌어 온다. 사건 발생 10분 전부터 사망한 스눕이 이송되던 때까지 약 30분 가량의 시간이 분할화면과 다양한 줌인으로 재구성된다. 빌 모리슨이 오랜 기간 파운드 푸티지 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사건>은 그의 다른 영화들과 꽤나 다르게 다가온다. 그의 작품 절대다수는 필름을 주된 재료로 사용해 왔으며, 오래된 필름이 부식되고 촬영된 이미지가 일그러진 형태를 회화적 구성요소로서 사용해왔다. 이를테면, <도슨 시티: 얼어붙은 시간>에서 영구동토층에 묻혀 있던 필름의 노이즈와 오염된 형태들은 그 자체로 필름이 견뎌낸 시간의 지표이자 시간으로 인해 변형된 이미지가 가져다 주는 독특한 미적 감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건>은 그와 다르다. 이 영화는 빌 모리슨의 전작들보단 차라리 <서치>와 같은 모바일 디바이스 시대의 스릴러 영화와 닮아 있다. 미술작가 '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가 <사건>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건>은 2018년의 총격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을 넘어 파편적인 푸티지들을 하나의 '증거'로 만들고자 시도하는 것만 같다. 빌 모리슨의 앞선 작품들이 시간의 증거로서 푸티지들을 발견했다면, <사건>은 오로지 '사건'의 증거로서의 푸티지를 가져온다. 그의 새로운 작업 속에서 우리는 먼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죽임을 당한 피해자를 보게 된다. 

<산산조각 난 해> 오민욱 2024

영화는 오민욱 감독과 그의 전작 <해협>의 프로듀서 샤오 카이츠가 주고 받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샤오 카이츠의 언어와 음성으로 낭독되는 편지와 함께, 오민욱 감독이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촬영한 이미지들이 매우 느리게 재생되듯이, 혹은 역행하는 이미지로서 등장한다. 두 사람은 <해협> 이후 새로운 영화를 촬영하려 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대신 오민욱은 김해 진영 학살과 조갑상의 소설을 재료 삼은 영화 <유령의 해>를 제작했다. <산산조각 난 해>는 앞선 두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팬데믹으로 인해 만나지 못한 두 영화인은 과거를 떠올린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밀봉된 과거를 열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아두며"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오민욱 감독은 지난 10여년 간 촬영한 영상들을 정말 느릿하게 풀어 놓는다. 사실 <해협>과 <유령의 해>를 보지 못했다면 오민욱과 샤오 카이츠의 편지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편지-대화는 너무나도 사적이며 얼핏 영화를 관람하는 타인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산산조각 난 해>는 흥미롭다. 영화는 두 사람의 대화를 설명하기보단 그들이 펜데믹 이전부터 편지를 주고 받았음을, 팬데믹이 만들어낸 거대한 단절의 감각을 담아낸다.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 소다 카즈히로 2024

소다 카즈히로는 스스로 관찰 영화(observational films)라 명명한 자신의 작업방식을 이어 나간다. 관찰영화 시리즈의 열번 째 작품인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은 제목 그대로 일본의 작은 섬 우시마도에 있는 고코구 신사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과 신사 주변의 마을 공동체를 담아낸다.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령 공동체인 이곳의 사람들은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지만, 그들 나름의 불만사항도 가지고 있따. 고양이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밥을 주는 것은 괜찮지만 그들이 버리고 가는 쓰레기와 길고양이들이 마을 곳곳에 싸는 배설물은 골칫거리다. 2차대전 당시 학생이었던 마을의 노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양이를 대한다. 낚시하러 온 이들은 물고기를 던져 주고, 구청에서는 길고양이들의 중성화를 지원한다. 종종 섬으로 사진을 찍으러 오는 아마추어 사진가는 고양이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감독은 태풍이 불어오자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고양이에게 현관을 내어준다. <고코구 신사의 고양이들>은 '동물과의 공생' 같은 구호를 외치는 영화가 아니다. 소다 카즈히로는 자신이 세운 '관찰영화'의 원칙대로 마을을 공유하는 사람과 동물들을 담아낼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소다 카즈히로 스스로도 일종의 지향점으로 여기는 프레데릭 와이즈먼의 영화를 연상케 한다. 다만 와이즈먼의 영화가 시청, 도서관, 미술관, 마을 등 하나의 공간을 유기체적 대상으로서 담아왔다면, 소다 카즈히로의 영화들은 공간보단 사건이나 구성원을 중심으로 영화를 직조해왔다. 영화의 제목이 '고코구 신사'가 아니라 '고양이들'에 방점을 찍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람, 돌보는 사람, 동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 그저 우연히 고양이들의 터전이 된 신사에서 일하는 사람 등, 영화는 우연찮게 고양이들과 공존하게 된 이들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여기에는 감독 자신도 포함된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가 갖는 시선의 위계를 벗어나 그야말로 '관찰'에 가까운 형태로 나아간다. 소다 카즈히로의 영화들은 그렇게 꾸준히 관찰과 기록을 이어 나간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 재니스 콜, 홀리 데일 1984

캐나다 여성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 죄수들을 다뤘던 다큐멘터리 <P4W: 프리즌 포 우먼>을 연출했던 재니스 콜과 홀리 데일이 캐나타 성매매의 수도라 불리는 벤쿠버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들을 촬영한 작품이다. '창녀(hooker)'라는 단어를 제목에 내세우지만, 영화는 거리의 성노동자들이 (다분히 혐오적 뉘앙스가 들어간) 이 단어로 일축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담아낸다. 데이비 스트리트에는 시스젠더 여성뿐 아니라 남성, 트랜스젠더, 크로스드레서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성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노동 중 발생하는 위험에 맞서 연대하며 서로를 보호한다. 물론 이 과정은 갈등을 낳는다. 묵힌 감정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서로의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데이비 스트리트의 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성노동에 새로이 유입될 청소년들을 걱정하기도 한다. 트랜스 혹은 크로스드레서 자녀를 둔 부모의 인터뷰가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는 그들의 삶을 무언가 특별한 것처럼 다루지 않는다. 거리는 그들의 일터이며 그들의 노동은 여느 서비스업에서의 노동-손님의 요구를 파악하고, 가격을 흥정하고, 서비스를 수행하는-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영화는 삶을 영위하는 하나의 형태로써 이들의 삶을 담아낸다. 성노동에 관한 논의들은 종종 그것을 수행하는 이들의 존재를 배제하거나 단순하게만 파악한다. <데이비 스트리트의 창녀들>은 그것이 모든 노동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삶의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누군가 살아가고 노동하는 터전을 무작정 철거하고 보이지 않게 하는 것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야닉> 캉텡 뒤피유 2023

지루한 코미디 연극이 상연되던 중,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휴가를 내고 먼 길을 이동해 연극을 보러 온 야간경비원 야닉은 연극이 재미없다는 항의를 보낸다. 당황한 배우들은 그를 쫓아내지만, 배우들이 야닉의 말들을 가지고 농담하던 소리를 들은 야닉은 권총을 뽑아들고 다시 극장에 돌아온다. 그는 재미없는 연극 대신 자신이 새로 쓸 각본으로 연기할 것을 배우들에게 요구한다. <야닉>은 최근의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성실하게, 놀라운 속도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캉텡 뒤피유의 신작이다. 이 영화의 발표 이후 <더 세컨드 액트>가 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소개된다는 소식이 들려와 <야닉>을 두고 신작이라 말하는 게 어딘가 어색해져 버렸지만... 이번 영화 또한 2022~2023년 내놓은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흡연하면 기침한다>, <다아아아아아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한 장르나 컨셉을 소재로 가져오고, 그것을 해체하듯한 방식으로 코미디를 구성한다. 물론 이 코미디가 우리에게 익숙한 '빵빵터지는' 무언가는 아니다. 캉텡 뒤피유에게 '장르'는 예술이 지닌 일종의 규칙이며, 그는 그것을 위반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한다. <야닉>은 그러한 시도 중 가장 '예술' 자체에 대한 패러디로써, 연극 무대가 가정하는 '제4의 벽'과 같은 예술적 규칙들을 빈번히 위반하고 봉합하길 반복하며 추동된다. 다만 이와 같은 시도가 새로운 것, 혹은 캉텡 뒤피유라는 작가의 고유한 어떤 것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예술에서건 엔터테인먼트에서건) 장르는 언제나 스스로를 쇄신하면서 발전하고 분화해 왔으며, 캉텡 뒤피유의 영화들은 결국 그 흐름 속에서 해석될 뿐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의미에서 캉텡 뒤피유가 그저 '탁월한 어그로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야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야닉이 직접 쓴 극이 공연되는 순간은, 어쩌면 그가 <광란의 타이어>부터 10여년 간 해온 작업들의 구성방식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가깝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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