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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15. 2024

천체들의 거리처럼

<새벽의 모든> 미야케 쇼 2024

 ‘관계’를 찍을 수 있는가? 미야케 쇼의 영화들은 꾸준히 그 질문에 답을 해왔다. 지루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방구석의 래퍼들의 작업과정을 담아내거나(<더 콕핏>), 풋풋한 중학생의 사랑을 지역의 과학 프로젝트에 엮어내거나(<와일드 투어>), (어딘가 형용모순이지만) 폴리아모리적 삼각관계를 하코다테의 여름 풍경에 녹여내거나, 들려오는 소리와 몸짓의 집합으로 팬데믹 시기의 도쿄를 그려냈다(<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신작 <새벽의 모든>은 또 다른 방식으로 관계에 접근한다. PMS를 앓을 때면 과하게 신경질적으로 변해 정신과를 다녔던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가 있고, 공황장애를 앓아온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가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어느 아동용 과학 키트 제작사 쿠리타 과학에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야마조에가 회사에서 공황발작을 일으키자, 같은 약을 먹어왔던 후지사와가 바닥에 떨어진 약을 찾아주며 둘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새벽의 모든>은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로맨틱한’ 관계에 관한 영화도 아니다. 영화는 익숙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지 않는다. 다만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라는 두 사람이 어떤 간격으로 서로를 놓고 살아갈 수 있는지, 그들이 이전의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쿠리타 과학으로 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관계와 거리의 미학이랄까.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어떤 순간에는 놀랄만큼 가까워지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흔히 말하는 ‘둘도 없는 친구’ 같은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어정쩡한 선물을 주고받고 얼떨결에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함께하지만 한 사람의 존재가 다른 사람의 생활이나 업무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미니 플라네타륨(천체투영관)은 그들의 관계를, 나아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 전체의 관계를 드러낸다. 태양이 조금만 지구와 가까웠어도 지표면이 전부 타버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매 시간마다, 매일 마다 다른 하늘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절묘하게도 반복된다. 달과 별자리는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를 찾고, 낮 다음에는 밤이, 밤 다음에는 낮이 찾아온다. 천체들 사이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처럼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자연과학적 산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 사이의 절묘한 거리가 만들어낸 관계 속에서 생명이 살아간다. 사회는 종종 그 절묘한 거리감을 무시한다. 권위나 관습, 기술의 형태로 거리감을 좁혀오는 타인들의 기습 속에서 두 주인공은 버텨왔고 한 차례 무너졌다. <새벽의 모든>은 그렇게 무너진 것이 그 둘뿐만이 아님을, 그리고 그 무너진 자신을 꾸준히 재건해야 함을, 나아가 그러한 재건이 각각의 거리를 유지하며 운동하는 천체들과 같은 관계 속에서 가능함을 보여준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흔히 ‘매직타임’이라 불리는, 햇빛이 조금씩 다가오며 밤의 어둠을 몰아낸 어슴푸레한 하늘에 여전히 달과 별을 발견할 수 있는 새벽, 거기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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