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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6. 2017

스필버그가 담아낸
재난, 공포, 트라우마

과소평가된 스필버그의 재난영화 걸작  <우주전쟁>

 H.G. 웰즈의 소설 『우주전쟁』은 최초로 에일리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충격적인 원작은 이후 오슨 웰즈의 라디오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을 집에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 1953년에 한 번 영화화되기도 했으며, 팀 버튼의 <화성침공>처럼 괴상한 버전으로 번안되기도 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년작 <우주전쟁>은 H.G. 웰즈의 원작을 9/11 이후 미국에 대입시키면서 풀어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상의 파괴, 세계 최강국이라던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광경, 가족주의의 해체 등 ‘Great America’의 모습이 파괴되는 모습이 <우주전쟁> 안에 담겨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원작에 충실한 엔딩이지만, 개봉 당시에 당황스러운 결말이라는 평이 많았던 후반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스필버그는 거대한 폭력과 파괴가 휩쓸고 간 미국의 풍경을 116분의 러닝타임 초중반을 통해 보여준다. 번개를 통해 땅 속에 묻힌 트라이포드에 탑승하는 외계인, 거대한 외계 기계가 뿜어내는 광선에 재가되어 옷가지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들, 달리는 레이(톰 크루즈)의 뒤로 주저앉는 건물들, 온몸에 재를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온 레이의 모습…… 9/11 테러의 장면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만드는 재난들이 <우주전쟁> 속에 등장한다. 다시 말해 <우주전쟁>은 9/11 이후 미국의 트라우마, 공포와 관객이 대면하는 영화이다. 적들을 쳐부숴야 한다고 외치는 아들 로비(저스틴 채트윈)와 영화 내내 비명을 지르며 패닉에 빠지는 딸 레이첼(다코타 패닝, 많은 관객이 민폐 캐릭터라고 말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렇다 할 민폐 짓은 없었다) 등의 모습은 9/11 이후 미국인의 초상이다.


 영화 후반부 군대를 향해 달려간 로비와 헤어진 레이와 레이첼은 땅속에 숨어있다가 레지스탕스처럼 반격을 꾀하는 오길비(팀 로빈스)의 지하실에 숨게 된다. 그저 생존하려는 레이와 외계인에 맞서 싸우려는 오길비는 갈등을 빚는다. 외계인이 인간의 피를 비료처럼 뿌리는 것을 보고 광분하는 오길비 때문에 자신과 딸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레이는 레이첼의 눈을 가린 뒤, 오길비가 있는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격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눈가리개를 내린 레이첼의 뒤로 한 사람이 지나가고, 레이첼은 그를 보려고 고개를 돌린다. 얼굴에 피를 묻힌 레이가 계단에 앉아있다. 그들을 침략한 존재만큼 잔혹해지는 인간을 그린 클리셰, 외계인이나 좀비 등이 등장하는 아포칼립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던 클리셰처럼 느껴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레이첼은 트라이포드에 붙잡히고, 레이도 딸을 따라 잡힌다. 수류탄으로 트라이포드를 폭파시키고 탈출한 그는 아내가 있는 보스턴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외계인들은 지구의 미생물에 의해 파멸을 맞이하고, 레이와 레이첼은 죽은 줄 알았던 로비, 그리고 아내의 가족과 재회한다. 스필버그식 해피엔딩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어릴 때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이기 때문인지, 극장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그것도 필름 상영을 통해서) <우주전쟁>을 접해서 그런 것인지 ‘이것이 과연 해피엔딩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지하실 문을 열고 나온 것이 레이가 아니라 오길비가 아닐까? 해당 장면 이후의 영화는 레이가 죽은 후에 상상한 장면, 혹은 그가 천국으로 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오길비와의 격투 이후 레이는 트라이포드를 폭파시키고 레이첼을 구함으로써 미국적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된다. 이후 보스턴 장면에서 군인들에게 트라이포드의 방어막이 뚫렸다는 정보를 전해주는 장면에서 미국 특유의 영웅주의가 다시 한번 강화된다. 미국이 세계를 구했다는 롤랜드 에머리히 스타일의 국가 영웅주의는 아니지만, 서부극에서부터 슈퍼히어로까지 이어지는 영웅주의 서사가 후반부에 다다라서야 드러난다. 또한 레이첼을 구하고, 로비와 재회하는 장면은 재난 이전부터 무너져있던 가족의 재결합을 보여준다. 정황상 죽었음이 거의 확실한 로비가 멀쩡하게, 그것도 레이보다 먼저 보스턴의 처가에 도착해 있는 설정은 스필버그가 의도적으로 조금 무리해 보이게 가족의 재결합을 드러내려고 했음을 보여준다. 해당 장면은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을 통해 콘트라스트를 높게 만들어 천국에서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연출된다. 

 영화는 외계인이 미생물에 감염(?) 되어 파멸을 맞이한다는 원작의 설정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이런 설정은 짧으면서도 긴(공격의 시작부터 엔딩까지의 영화 속 시간은 길어야 4, 5일 정도로 생각된다) 외계의 침공을 시간이 흐르면 지나가는 자연재해처럼 느껴지게 한다. 태풍, 지진처럼 피해를 가져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끝나는 자연재해, 스필버그는 테러와 그 이후의 트라우마를 자연재해처럼 떠나보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비록 현실에서는 레이가 죽고 오길비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트럼프의 미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엿볼 수 있는 포인트랄까. 물론 영화에서 드러난 엔딩은 해피엔딩이다. 다만 스필버그는 영화의 후반부가 레이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GreatAmerica’라는 슬로건에 필요한 요소를 후반부에 몰아서 등장시키는 플롯은 이를 뒷받침한다.


 <우주전쟁>은 이렇게 9/11의 트라우마와 공포를 이야기한다. 스필버그가 보여주는 재난의 모습은 급작스러우면서 파괴적이다. 재난의 트라우마를 스크린에 소환해내고 극복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스필버그의 영화는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하다. 세월호 이후 <부산행>, <터널>, <판도라> 등 동어반복의 메시지만을 담은 재난영화를 찍어내는 한국의 모습과 괜히 비교되면서, 우리나라에서 스필버그처럼 재난을 다룰 수 있는 작가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분노 이후의 성찰과 소망을 담아낼 작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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