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으로 재해석된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스포일러 주의
제프 브리지스, 레이첼 맥아담스, 마리옹 꼬띠아르, 제임스 프랭코, 베니치오 델 토로, 폴 러드, 폴 지아마티, <인터스텔라>의 어린 머피로 활약한 맥켄지 포이……. 연말 시상식 레드카펫 출연자 리스트가 아니다. 오는 12월 17일에 개봉할 애니메이션 <어린왕자>의 목소리 출연자의 리스트이다. 프랑스의 애니메이션이지만 배급을 파라마운트사가 맡으면서 황홀한 캐스팅이 완성되었다. 참고로 프랑스 버전에서는 국민배우 뱅상 카셀이 여우 목소리를 맡았다.(할리우드 버전에선 제임스 프랭코)
당연하게도 <어린왕자>는 생택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원작을 그대로 옮겨오진 않았다. 원작의 이야기를 액자식 구성 안에 집어넣었다. 때문에 <어린왕자>의 주인공은 어린왕자가 아니라 맥켄지 포이가 목소리를 맡은 한 소녀이다. 소녀는 그녀의 엄마(레이첼 맥아담스)가 주문하는 대로 살아간다. 소녀의 엄마는 공장 품질관리표만큼 빽빽한 소녀의 인생계획표를 만들어주고 이대로 살면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공부하던 소녀의 책상에 옆집의 조종사 할아버지(제프 브리지스)가 보낸 종이비행기가 날아온다. 종이비행기에는 조종사가 만난 어린왕자(라일리 오스본)의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소행성 B612에서 장미 한 송이(마리옹 꼬띠아르)를 사랑하며 바오밥 나무를 자라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어린왕자.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 소녀는 조종사를 찾아가 남은 이야기를 모두 듣고서 어린왕자가 사랑하는 장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어린왕자>는 액자식 구성을 위해 소설 『어린왕자』의 내용 부분을 3D애니메이션이 아닌 스톱모션 방식으로 표현했다. 흔히 사용되는 클레이 방식 대신 종이 재질로 만들어진 스톱모션은 마치 그림책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도 좋지만, 성인 관객들을 어린 시절로 돌려놓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영화의 소재가 ‘동심’인 것을 생각하면 가히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어린왕자>에 처음 관심을 가진 이유도 예고편에서 3D와 스톱모션을 오가는 방식 때문이었다.
3D로 표현된 현재 시점에 해당하는 장면들은 색채와 사물에서 조종사와 그 외의 인물들의 대비가 확실하다. 명문학교 진학을 위해 소녀와 엄마가 이사한 동네를 부감으로 찍은 장면을 보면 마치 정교한 컴퓨터 기판의 회로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꽤 여러 번 반복해 등장한다. 정확한 직각의 사각형으로 집들을 둘러싼 도로에선 회색, 남색 등 채도가 낮은 색의 차들이 전기처럼 일정하게 흐르고 있고, 흰색의 집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부품처럼 획일화되어있다. 아이의 인생계획표를 짜주고, 그것에만 맞춘 생활을 강조하며, 그래야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심지어 이혼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생일선물로 매년 스노우 볼을 선물한다. 예쁜 집이나 오두막 대신 회사들로 가득한 빌딩이 들어있는 스노우 볼이다.
반면 조종사의 집은 나무로 지어진 듯 갈색이고, 획일화된 모양이 아니며 자동차는 하늘색이고 비행기는 빨간색이다. “어린 시절을 잊지 마.”라는 조종사의 대사처럼 그의 집은 ‘축적(hoard)’된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동네의 다른 집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어린왕자를 만나 ‘동심’을 아직 잊지 않았음을 깨닫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조종사를 만나고 어린왕자를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생각 소년 조종사의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하지만 하늘의 별들과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소행성들은 없고, 암울한 분위기에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행성만 보인다. 어린왕자를 찾아 소녀는 그 행성으로 향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어린왕자는 미스터 프린스(폴 러드)라는 이름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동심은 사라진 채 철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린왕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그의 소행성 주변에 있던 다른 소행성의 비즈니스맨(앨버트 브룩스)이다. 그는 행성을 사들여 빌딩 숲으로 만들었고, 별들과 소행성들을 모아 에너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에게 별을 보며 상상에 빠지는 동심은 불필요한 것이고, ‘훌륭한 어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선 미스터 프린스를 포함한 사람들을 일벌레로 바꿔놓았다.
동심이 사라진 세계. 이는 곧 상상력이 사라진 세계이다. 그 세계엔 즐거운 일이란 없다. 스트레스, 축 처진 어깨, 다크서클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소녀가 이사한 동네처럼 획일화되어있고 낮은 채도의 색깔로 가득하다. 밝은 초록색과 노란 목도리를 두른 어린왕자는 검은 때가 가득 묻은 초록 작업복에 노란 넥타이를 맨 남자로 변해 있다. “훌륭한 어른이 되려면 ~해야 돼”라는 어른들의 말에 때 묻은 어린왕자는 더 이상 ‘어린’왕자가 아니었다. 비즈니스맨을 미롯한 소위 어른들이 정한 ‘훌륭한 어른’이라는 틀에 자신을 맞추려는 바보만이 남아있었다. 사랑하는 장미는 까맣게 잊은 채.
소녀의 도움으로 미스터 프린스는 어린왕자로 돌아온다. 소행성 B612로 돌아온 어린왕자는 장미가 말라죽은 것을 확인했지만 그가 좋아하는 석양 속에서 장미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린왕자가 말하는 ‘나의 장미’는 물질로써 존재하지 않고 마음속에 존재한다. 이를 깨닫는 순간 미스터 프린스는 어린왕자로 돌아왔다. ‘나의 장미’는 동심이었다.
누구나 ‘나의 장미’가 있었을 것이다.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에서의 빙봉처럼, 사람의 동심을 상징하는 장미 말이다. ‘철이 든다.’라는 미명 하에 잊히게 될 장미. 축 처진 어깨와 다크서클이 가득한 어른들이 <어린왕자>를 봤으면 좋겠다. 하트처럼 빨간 장미가 다시 피어오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