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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09. 2017

전장에 신념을 묻는 연출

멜 깁슨의 전쟁 실화 <핵소 고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한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미국 육군에 자원입대한다. 종교적 신념과 개인적인 기억으로 인해 총을 만지지 않겠다고 신에게 약속한 데스몬드 도스(앤드류 가필드)가 그 주인공이다. 훈련소에서 집총훈련을 거부함으로써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등의 고초를 겪은 그는 결국 그의 소원대로 총을 들지 않은 채 의무병으로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된다. 총 없이 전장을 누비던 그는 결국 핵소 고지 전투에서 75명의 부상병을 구해내고, 기적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사기가 올라간 미군은 핵소 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분에 노미네이트 된 멜 깁슨 감독의 다섯 번째 연출작 <핵소 고지>는 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렇게 종교적이고 영웅 중심적인 전쟁영화는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연출했던 멜 깁슨이라 그런 것일까, <핵소 고지>는 139분의 러닝타임 동안 주인공 데스몬드의 종교적 신념만을 강조한다. 영화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는 데스몬드의 여정을 마치 예수의 고행처럼 그려낸다. 집총훈련에 참여하라는 상관의 명령과 규율(율법)을 거부하고, 그것으로 인해 군사재판에 회부되며(빌라도에게 재판받은 예수), 피범벅이 된 채로 부상병을 둘러업고 핵소 고지를 가로지른다(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예수). 피와 진흙에 눈이 가린 부상병을 씻겨 앞을 보이게 하고(눈먼 자를 눈뜨게 한 기적), 세례를 받듯 물을 끼얹기도 하며, 들것에 실린 데스몬드가 승천하는 성인의 모습과도 같은 앵글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명징한 메시아의 상징들은 영화 속 다른 이야기들, 가령 약혼자 도로시(테레사 팔머)와의 이야기나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는 아버지(휴고 위빙)와의 이야기에 앞서 관객 앞으로 튀어나온다. 영화 내내 납작하게 배경에서 데스먼드만 튀어나온듯한 촬영이 유지되는 것은 영화가 오로지 데스몬드의 신념을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스몬드를 메시아로 그려내는 영화의 태도는 집착에 가깝게 느껴진다. 핵소 고지 전투 장면은 15세 관람가가 믿기지 않는 수위의 폭력과 넝마가 된 시체들을 전시한다. 몇몇 장면은 FPS게임을 떠올리게 만든다. 러닝타임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핵소 고지 장면은 폭력의 향연 속에서 무기 없이 전장을 누비는 데스몬드를 부각한다. 데스몬드의 신념을 강조하기 위해 전투 장면을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었다는 의심이 들 정도다. 명백히 세례와 승천을 연상시키는 전투 이후의 장면들은 데스몬드의 신념을 과하게 포장한다. 과도한 상징은 메스꺼울 정도로 잘 만들어낸 중반부 전투 장면을 데스몬드의 신념을 전시하기 위한 장으로 축소시킨다. 스크린이 아닌 VR을 통해 전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현장감은 신념 하나만을 드러내기 위해 소비된다. 또한 별다른 고민 없이 (대사까지 동원하며) 일본군을 사탄으로 그려내는 방식은 오로지 데스몬드가 성자이자 메시아임을 강조시키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가 적군인 일본군 마저 구해내는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함으로써 반대쪽 뺨까지 내주는 성자의 모습이 완성된다. 실화에 기반한 영화이지만, 전장의 모습이 오로지 그의 신념을 강조시키기 위해 세팅되어 있는 연출은 짧은 감동 후 격한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방식으로 전쟁과 폭력을 소비하는 영화의 태도는 십계명을 지키며 폭력과 살육에 반대하는 데스몬드의 태도와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심각한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핵소 고지 근방 기지에 처음 도착한 데스몬드의 부대는 부상자와 시체를 실어오는 트럭과 마주한다. 카메라는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병사들의 옆을 지나가는 트럭에 실린 시체의 시선으로 공포가 실린 병사들의 표정을 잡는다. 이와 같은 앵글은 후반부에 다시 반복된다. 밤새 부상자들을 구하고 고지에서 내려와 들것에 실려가는 데스몬드의 시점으로 병사들을 바라보는 시점은 트럭에 실린 시체의 시선의 반복이다. 데스몬드의 시선으로 본 병사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믿음이 실려있다. 시체의 시선으로 바라본 공포와 데스몬드의 시선으로 바라본 믿음이 앵글을 통해서 대비된다. 전쟁의 폭력에 희생된 시체의 시선을 데스몬드를 강조시키기 위해 끌어들이는 것은 옳은 선택일까? 영화가 끝나고 느껴지는 묘한 불쾌감의 원인이 이런 방식의 연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중반부 데스몬드가 홀로 밤새워 부상병들을 구출하는 장면에서, 그는 “한명만 더”를 반복해서 말한다. 신에게 고난의 이유를 묻고, 그를 찾는 부상병들의 절규가 신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라 여긴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느껴지는 감동은 아직 소년의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앤드류 가필드의 호연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전반부의 지루함과 후반부의 과도한 상징은 배우의 호연과 중반부의 나쁘지 않았던 연출을 갉아먹었다. 인물의 신념을 강조하기 위해 전쟁을 단순한 배경으로 사용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상징을 집어넣는 선택은 담백하게 감독을 전달할 수 있었던 영화의 태도 자체를 뒤집어버린다. 데스몬드를 통해 믿음을 얻고 사기가 올라간 병사들이 다시 한번 핵소 고지로 진격하는 장면을 과도하게 폭력적으로 그려낸 것은 오히려 데스몬드의 신념에 반하는 선택이다. 소총에 액션캠을 달고 촬영한듯한 앵글과 일본군을 사격하는 병사의 1인칭 시점으로 담은 장면, 할복하는 일본군을 슬로 모션으로 그려낸 장면은 신념을 지키던 사람의 감동을 단박에 무너트린다. 게다가 날아오는 수류탄을 날아차기로 날려버리는 장면은 헛웃음만 나온다. 

 <핵소 고지>는 결국 전장에서 신념을 지킨 한 인간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신념은 상징과 우상화에 묻히고 변색된다. 과한 종교적 색채와 신념과 반대되는 태도의 연출 때문에 감동은 찰나에 스쳐 지나가고 불쾌함만이 남는다. 초반부의 부실한 각본은 캐릭터를 기계적으로 설정할 뿐, 관객을 설득시키지 못한다. 관객을 극에 온전히 몰입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현장감 넘치는 전투 장면은 관객이 인물에 몰입하게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스크린 위로 붕 뜬 데스몬드의 신념은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다. 오랜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멜 깁슨의 연출력은 실망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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