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2월 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오동진 평론가가 임명되었습니다. 오동진은 다큐멘터리 창작자이기도 한 장혜영 전 의원에게 정치적 견해 차이를 두고 “앞으로 영화만든다고 깝죽대기만 해보거라. 자근자근 씹어주마“라고 페이스북에서 발언했고, 그 이전에는 보수매체에 기고/출연하는 평론가가 있다면 영화비평/저널리즘 업계에서 퇴출시키겠다고 쓰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동진의 발언이 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열한 발언이지만, 별다른 직함 없이 영화평론가이기만 한 사람의 발언이라면 잠시 욕하고 지나가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올해로 18회를 맞이한 스스로 아시아를 대표한다 자부하는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무엇보다 평화를 테마로 한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의 자리에 오른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영화제의 의미를 퇴색시킬 뿐더러, 그의 발언은 이번에 획득된 지위에 힘입어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블랙리스트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소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랜 기간 DMZ영화제를 찾있던 관객으로, 그리고 17회 영화제에 특별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인사에 항의하는 다큐멘터리 공동체 성명서에 참여합니다. 관심있는 창작자와 관객 모두의 연서명도 부탁드립니다.
2.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의 개봉 소식을 듣고 깜짝놀랐다. 박세영의 신작이 영화제 없이 개봉하는 것도 신기한데, 우즈(조승연)이 주연이고 저스틴 민과 정회린이 출연한다니, 어딘가 세계관이 충돌하는 느낌이랄까. 마침 오늘 발매 예정인 우즈의 첫 정규앨범 [Archive. 1]의 60분짜리 뮤직비디오 같기도, 혹은 뮤직비디오로 출발했지만 영화의 꼴을 갖추게 된 어떤 영상 같기도 하다. 기타 수리점을 운영하며 가수의 꿈을 꾸는 우진과 시은 남매 앞에 홍남기라는 정체불명의 부랑자가 부셔진 기타를 고쳐달라며 나타나고, 우진이 간단하게만 수리한 기타를 튕기자 곧장 아이돌 락스타가 된다. 남기는 기타에는 서른 몇 개의 부품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고, 우진은 저주받은 기타와의 동행을 이어가기 위해 부품들을 찾아 다닌다. 영화는 우즈의 실제 캐릭터성, 여러 아이돌 그룹과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솔로 데뷔한 이후 락발라드 스타일의 곡으로 마침내 히트를 기록한 서사와 케이팝/힙합/락을 그때그때 오가는 음악 등을 그대로 끌어온다. 박세영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고 이러한 방식의 협업에서 자주 보이는 특징이기도 한, 별다른 개연성 없이 감각적 이미지와 인물의 욕망으로 추동되는 정동을 그대로 이미지화하는 방식은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의 기획에 아주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비좁은 기타 가게를 억지스러운 광각으로 한껏 늘어뜨려 우진의 권태감을 담아내는 중국산 가성비 초광각 렌즈, 100년이 넘은 렌즈의 녹과 곰팡이가 개입된 이미지, 츠카모토 신야의 <철남>이나 야마구치 유다이의 <미트볼 머신> 같은 일본 고어영화에서 따온 듯한 차갑고 질척이며 끈적한 질감의 쇠와 점액질들, 희뿌연 질감의 공연장과 과도하게 생생한 현장감의 경매장... <슬라이드 스트럼 뮤트>는 우즈라는 톱 아이돌의 컴백에 맞춰 제작된 기획상품이고, 영화 중간중간 박세영의 전작들에서 봤던 상황이나 대사가 재활용(이르테면 기타가 할아버지 것이라 말하는 우진의 대사는 <캐쉬백>의 우표 장면에서 거의 그대로 등장했다)되기도 한다. 다만 무성의한 콘서트 실황 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2만원 후반대의 가격으로 폭리를 취하는 와중에, 러닝타임이 60분이라고 일반 티켓보다 저렴하게 개봉한 이 영화의 선택들이 훨씬 흥미롭고 훌륭하지 않은가? 독자적인 영화로써 홀로 서있는 영화라 말할 순 없지만, 무성의하고 천편일률적인 아이돌의 극장용 콘텐츠 중 손에 꼽을 만한 즐거움으로 채워져 있다.
3. 매기 질렌할의 두 번째 장편 <브라이드!>는 그의 방식대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를 다시 쓴다. 헌데 그 방식이 퍽 흥미롭다. 1935년 제임스 웨일의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의 원작자 메리 셸리가 해당 작품을 쓰게 된 일화에서 출발한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밤, 바이런 경과 퍼시 셀리 등 당대 문인들과 어울리던 메리 셸리가 무서운 이야기를 써보는 내기에서 창조한 것이 소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일화 말이다. 웨일은 같은 상황 속에서 메리 셸리의 지인들이 다시금 프랑켄슈타인의 뒷이야기를 알려달라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다만 여기서 '이전 이야기'로 언급되는 것은 소설이 아니라 1931년작 영화 <프랑켄슈타인>이지만... 여하간 <브라이드!>도 비슷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스크린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부(제시 버클리)도, 창조주의 이름을 물려받아 쓰는 프랑켄슈타인(크리스찬 베일)도 아니다. 제시 버클리가 연기한 메리 셸리는 사후에도 존재해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백여 년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그는, 경찰의 정보원으로서 마피아에 접근한 젊은 여성 아이디에 빙의한다. 놀란 마피아들은 그를 죽여 매장한다. 한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시카고에서 소생을 연구하던 유프로니우스 박사(아네트 베닝)을 찾아온 프랑켄슈타인은 여자 시체를 가져와 소생시켜 신부로 삼겠다는 부탁을 건낸다. 결국 둘은 시체를 파와 소생시키는데, 하필이면 메리 셸리가 빙의한 아이다였다. 아이다로서의 기억과 메리 셸리의 자아가 파편처럼 뒤섞인 채 소생한 그는 프랑켄슈타인을 따라 영화관이나 레이브 (1930년대 미국이 배경이지만 알게 뭔가) 등을 다니던 중, 그를 강간하려던 두 남성을 프랑켄슈타인이 죽이자 함께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는 '신부'를 자신의 이름이자 정체성으로 삼는다. 이 과정을 보여줌에 있어 매기 질렌할은 거침이 없다. <벌집의 정령> 속 아나 토렌트가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에 이상하게 매료된 것처럼, <브라이드!>의 프랑켄슈타인은 로니 리드(제이크 질렌할)이라는 스타 배우에 매료되고 그의 영화를 반복적으로 관람한다. '신부'는 흐릿한 아이다 시절의 기억과 페미니스트 작가인 메리 셸리의 자아가 뒤섞인 채 전 미국의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을 하게 되고, 여성들은 그를 따라 총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한다. 프랑켄슈타인과 신부는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곳곳을 돌아다니고, 이들의 여정은 19세기 초 낭만주의 문학부터 고전기 할리우드의 뮤지컬과 스크루볼 코미디, 1970년대 퀴어 문화와 레이브, 1980년대의 페미니즘 제2물결을 제멋대로 뒤섞는다. 정척안경을 쓰는 극초창기의 3D영화와 자동차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프랑켄슈타인과 신부의 이야기로 스리슬쩍 탈바꿈하고, 그들은 스크린과 신문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문화적 아이콘이자 사상가가 된다. 물론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사는 소통이라기엔 각자의 발화에 그치고 언어는 정제되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이 정신산만하고 시대착오적인 레퍼런스로 가득한 이야기는 비극인듯 희극인듯한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잘은 모르겠다면, 적어도 매기 질렌할이 한껏 펼쳐놓은 난장판을 구경하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4. 아주 뒤늦게 국내에 도착한 <노 어더 랜드>의 개봉 직전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했다. 전쟁은 중동 전체로 번져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UAE 등 대부분의 국가에 폭탄이 떨어지거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무수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2023년 10월 7일 알 아크사 홍수 작전과 그 이후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기도 이전의 이스라엘 정착촌과 정착민의 만행을 담아낸 <노 어더 랜드>의 이미지보다, 당장 이란에서 미국/이스라엘의 폭격에 무너진 학교, 병원, 방송국의 이미지를 본다. 지난 3년 간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영상들을 모아 만든 낸 골딘과 데이비드 셔먼의 <가자> 같은 단편 작업마저도 이를 아주 뒤늦게, 갤러리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공개했을 뿐이니까(온라인으로 공개된 것은 올해 1월의 일이다). <노 어더 랜드>가 오스카에서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화제가 된 게 작년의 일이고, 수상 소식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연대하는 시민사회는 여러 논평을 내놓았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의 공동연출인 이 작품이 그들 사이의 우정을 보여주면서 "두 민족이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공존의 체계를 주장한다고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근본적으로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학술·문화 보이콧 캠페인(PACBI)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정상상태'로 간주하는 입장에 동의하는 펀딩을 받았거나 BDS 운동의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논평은 정당하고, 운동의 입장에서 요구된다. 이는 <노 어더 랜드>의 감독들과 제작진도 수용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다만 <노 어더 랜드>는 80년의 세월 동안 전개되는 나크바와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면으로 담아내며, 반복적으로 집이 철거되고 총성이 들려오며 언제 다시 불도저가 잠자리를 파괴할지 모르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아낸다. 너무 늦게 도착한 이 영화를,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보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