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5. 2017

'샤말란 유니버스'의 야심찬 시작

제임스 맥어보이의 소름 끼치는 연기가 돋보이는 <23 아이덴티티>

*스포일러 주의


 배리, 패트리샤, 데니스, 헤드윅, 케빈, 오웰, 제이드…… 이 이름들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연기된다. 제임스 맥어보이는 열정적인 디자이너, 미스터리한 여인, 결벽증에 걸린 남자, 9살 소년, 유약한 남자, 당뇨병 환자를 한 영화 안에서 연기한다. 23개의 인격을 가진 주인공은, 24번째 인격이자 초월적인 힘을 가능케 하는 ‘비스트’를불러내기 위해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를 비롯한 3명의 소녀를 납치한다. <23 아이덴티티>는 실제로 해리성 장애를 통해 24개의 인격을 가진 채 납치,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질렀던 빌리 밀리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오랜 침체기 이후 <더 비지트>로 부활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더 비지트>의 성공에 자신감이 붙은 듯,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프로젝트를 마음껏 펼쳐 보이는 영화였다.

 <23 아이덴티티>의 가장 큰 동력은 제임스 맥어보이의 연기이다. 23개의 자아 중 몸의 주인인 케빈을 포함해 7개의 영화가 영화 속에 출연하며, 후반부에 등장하는 비스트까지 총 8개의 캐릭터를 맥어보이가 연기한다. 그는 한 영화 안에서 8개의 메소드 연기를 한 번에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도 얼핏 드러나듯, 각 인격의 전사를 만들어두고 그에 맞는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며, 말투, 표정, 눈빛, 손짓, 걸음걸이까지 모두 다른 캐릭터들을 표현해낸다. 여러 인격이 순식간에 번갈아 가며 튀어나오는 충격적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맥어보이의 표현력은 실로 압도적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더 크라우디드 룸>이라는 제목으로 빌리 밀리건을 연기하려 했었다 무산됐는데, 맥어보이의 압도적인 연기가 나와버린 이상 그 누가 이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로맨틱하면서 인자하고, 유약함과 동시에 강인했으며 때론 소름 끼쳤던 맥어보이의 필모가 <23 아이덴티티> 속 연기에 집약되어 있다.


 2015년 <더 위치>를 통해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 안야 테일러 조이는 <23 아이덴티티>의 또 다른 축이다. 맥어보이와 조이 두 기둥이 영화를 지탱하고 이끌어간다. 속에 상처를 품고 있는 케이시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펼쳐 보이는 세계관 속의 슈퍼히어로이다. 샤말란의 2000년작 <언브레이커블>의 던(브루스 윌리스)이 강철의 인간으로 등장하는 것, 어린 시절 학대의 피해자인 케빈이 초인적인 능력의 비스트를 만들어낸다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케이시는 히어로가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짧게 등장하는 던의 모습은 샤말란이 어떤 세계관을 만들어 내렸는지 확실히 보여준다. 그의 후속작에서 케이시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된다.

<23 아이덴티티>는 샤말란식 여성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히어로의 탄생 및 슈퍼 빌런의 탄생을 위한 제물로써 소녀들이 등장하는 서사 구조를 극복하지 못한다. 장르의 법칙을 자신의 스타일과 세계관으로 재정립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근본적인 서사 구조 자체를 뒤집지 못하고, 그럴 생각이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케이시와 함께 납치된 클레어(헤일리 루 리차드슨)와 마르샤(제시카 술라)가 공포에 떨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는 쇼트, 주체적인 캐릭터인 양 등장했던 그들이 공포 게임의 배경처럼 소비되는 후반부, 식인의 타깃으로 소녀만이 고려된다는 설정 등은 샤말란이 극복하지 못한(그리고 아마도 극복하지 못할) 한계다. 그의 영화는 장르적 재미로 가득하지만,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샤말란식 여성 슈퍼히어로 탄생기”와 “전형의 답습, 소모되는 소녀들의 비명”이라는 평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붙잡히지 않은 비스트와 영화 말미에 등장한 던, 상처 입은 사람은 인간의 초월적인 부분을 끌어낼 수 있다는 세계관, 그 속에 남은 케이시의 모습이 그려지며 마무리되는 영화는 ‘샤말란 유니버스’라고 할 수 있는 세계관의 문을 연다. 다행히도 <23 아이덴티티>의 흥행으로 후속편이 제작될 수 있게 되었다. <언브레이커블> 때부터 품어온 샤말란의 야심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의 이름이 '러빙'인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