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생인 내 또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영화들이 있다. 하나의 세대를 만들어버린 <해리포터> 시리즈는 물론이고,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 <타잔>, <뮬란> 등 유치원~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봤을 디즈니 애니메이션들,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등의 영화는 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안 보면 간첩’인 취급을 당할 정도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는 위의 영화들은 나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을 함께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영화들이 있다. 개봉한 지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회자되고, 지금의 어린 친구들에게도 익숙할 영화, 바로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들이다.
지브리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영화가 아닌 TV용 애니메이션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브리의 작품은 아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고 흔히 말하는 ‘지브리 스타일’의 시작과도 같았다. 어느 경로를 통해 집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던 <미래소년 코난>(1978) DVD 세트를 통해 지브리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져(아마도 부모님이 바자회에 내놓지 않았을까) 다시 본 적은 없지만, 처음으로 접한 지브리 스타일의 작화와 세계관은 그 속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한창 <미래소년 코난>에 빠져있었는데, 덕분에 맨발로 놀이터를 질주한다거나 노래방만 가면 주제가를 부른다던가 하는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이제는 어떤 이야기인지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소년만화라는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극장에서 처음 본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당연하게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개봉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너도나도 보러 가던 영화였고, 지브리가 뭔지 정확히 몰랐던 때지만 <미래소년 코난>을 만든 곳에서 만들었다는 정보에 가족과 함께 대한극장으로 향했었다. 센의부모님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느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화려한 붉은 색채, 다양한 일본 신들의 모습, 초월적인 세계관, 물 위를 달리는 전차 등의 이미지는 치히로보다 어린 나이의 나를 매혹시켰다. 지브리에 ‘입덕’한 진짜 계기는 <미래소년 코난>이 아니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5년 재개봉 때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극장을 찾았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 극장에서 다시 만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그럼에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가장 좋아하는 지브리 영화는 아니다. 사실 최고의 지브리 영화가 무엇이냐 하면 한 번에 답하기가 망설여진다. 스팀펑크적인 성의 디자인이 인상 깊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지브리 초창기를 책임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칸 영화제 심사위원단의 떼창(?)을 이끌어낸 귀여움 <벼랑 위의 포뇨>(2008), 전쟁에 대한 풍자를 담아낸 블랙코미디 <붉은 돼지>(1992) 등의 영화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지브리의 로고이기도 한 <이웃집 토토로>(1988)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사실모든 작품에 킬링 포인트가 하나씩 있어, 한 편을 고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지브리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최고의 지브리 영화 한 편씩 꼽아보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끝내 한 편을 꼽진 못했다. 결국 두 편의 영화를 골랐다. 바로 <모노노케 히메>(1997)와 <천공의 섬 라퓨타>(1986)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많이 봐대던 영화이다.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이 언제인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미래소년 코난>과 비슷한 시기에 <모노노케 히메>를 보게 된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멧돼지에 거머리가 잔뜩 달라붙은듯한 모습의 재앙신과, 목이 뎅강하고 잘려버리는 사슴신의 모습이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영화를 여러 차례 볼수록 산에 불을 지르고,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슴신의 목을 베는 인간들이 무섭게 다가왔다. 지브리 특유의 환경보호적이고 자연적인 메시지가 가장 진하게 드러난 작품임을 증명하듯, 보면 볼수록 영화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들의 행동이었다. 사실 여러 겹이 있는 영화이기에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재앙신은 이름 그대로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다가오고, 그것에 도전한 아시타카가 벌을 받는 것과 같은 부분은 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극 중 인간 공동체의 모습이 사회주의 공동체로 그려진다는 것은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지브리가 그려내는 자연과 산, 그 속의 여러 신의 모습들은 지금 다시 봐도 놀랍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던 코다마,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 밑의 잡초들이 한순간에 자라났다 시들던 사슴신의 첫 등장 등은 지브리의 판타지적 순간의 정점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역시 언제 처음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미래소년 코난>과 세계관이나 주인공의 외모가 비슷했기에 찾아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 시타와 우연히 시타를 발견한 소녀 파즈, 시타의 목걸이에 달린 비행석을 노리는 무스카의 이야기가 스팀펑크 장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관에서 펼쳐진다. 어느 시대의 시점으로 봐도 뛰어난 작화는 증기기관으로 가득한 세계관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설립되고 제작된 첫 작품이기에 더더욱 힘이 들어간 영화의 생명력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말 그대로 ‘천공의 성’을 표현해낸 비주얼, 기괴한 외양의 거신병, 비행에 대한 동경 등 영화가 그려내는 세계관은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영화 후반부 움직이는 성의 모습이나 하늘을 누비는 공적단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글을 쓰다 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은 맞지만, 다른 감독들의 작품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지브리를 이끈 타카하사 아사오가 연출한 <추억은 방울방울>(1991)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어린 시절의 나를 냥덕후의 세계로 이끈 모리타 히로유키 감독의 <고양이의 보은>(2002),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가 연출한 <마루 밑 아리에티> 등의 영화도 오랜 시간 동안 즐겨 본작품이다. 여느 스튜디오가 그렇듯, 지브리에도 아쉬운 작품들도 있다. 그중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전기>(2006)가 좋은 예시이다..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를 즐기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재미없게 느껴졌던 영화는 <게드전기>가 처음이었다. 지브리라는 이름값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라는 조건 때문에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일까? 과한 기대치는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교훈을 얻은 자리였다.
지브리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속 음악 대부분을 담당한 히사이시 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브리를 탄생하게 만든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최근작인 <가구야 공주 이야기>(2013)와 <바람이 분다>(2013)까지 이어지는 협업은 지브리 작품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모노노케 히메>,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에 참여한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영화의 제목만 말해도 머릿속에서 선율이 떠오른다. 영화 자체의 톤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게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아닐까? 지브리 영화 속 그의 음악을 모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회도 여러 차례 개최됐었다. 히사이시 조가 <웰컴 투 동막골>(2006), <태왕사신기>(2007) 같은 한국의 영화/드라마나 기타노 다케시 영화의 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지브리의 영화 음악 하면 그의 이름이 떠오르고 히사이시 조의 이름을 들으면 지브리 영화 속 음악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미래소년 코난> 등을 통해 지브리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이제 미야자키 하야오가 (번복한다고는 하지만) 은퇴하고, 지브리에서 영화 제작을 멈추겠다고 발표하는(이래 놓고 다시 만드는 것 같지만) 상황까지 오게 됐다. 하야오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못하고, 발표하는 작품들이 이전 작품들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브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 지브리가 제작의 참여한 네덜란드의 작가 마이클 두독 드 비트의 <붉은거북>(2016) 같은 협업이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첫 3D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도 들려온다. 지브리의 영화를 봐온 지난 20년처럼 앞으로도 좋은 작품을 내주길 그저 기다려야겠다. 어린 시절의 판타지를 만들어준 지브리의 판타지아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