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가 스크린 안에 있던 것 같을 때가 있다. 작년 6월 극장에서 <우리들>을 보면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스크린 속 선(최수인),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 중 한 명은 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94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들>이 영사되던 스크린 속에서 내 모습이 보였던 이유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얼마 전 영화를 다시 봤다. 스크린(이 아닌 노트북 화면이었지만) 안에서 내 모습을 봤던 다른 이유를 찾았다. 영화 속에서 선과 지아가 돌아다니던 골목길, 괜히 탐나던 물건으로 가득한 문방구, 체육시간마다 피구를 하던 학교 운동장, 같은 반 친구들이 다니던 학원…… 영화 속 풍경이 어릴 적 돌아다니던 동네의 모습처럼 보였다. 영화를 보면서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던 골목, 줄넘기로 장난치며 놀던 놀이터, 축구를 하다 싸우곤 했던 학교 운동장 등이 떠올랐다. 선이의 집 구조 역시 친구 중 한 명의 집인 것 마냥 익숙했다. <우리들>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어린 시절의 내 생활 반경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러닝타임 내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강렬하게 떠올랐던 이유에는 공간적인 배경이 큰 몫을 차지한다.
내가 예전의 기억을 불러오는 방법은 공간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그곳을 떠올려 보면 그 공간에서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런 기억들은 그 공간에 갔을 때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너편이 어렸을 때 돌아다니고 놀던 공간이다. 골목, 친구의 집, 놀이터, 모든 공간이 아파트 건너편 블록에 있었다.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뛰어다니고, 딱지 치고, 오락기에 몇 시간이고 붙어있고, 친구네 가게인 정육점, 문방구 등을 돌아다녔다. 선, 지아, 보라가 그랬듯 누군가는 왕따였고, 왕따였다가 다시 친구가 되곤 했다. <우리들>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어린 시절을 불러내는 매개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공간은 이제 갈 수 없다.
우리 동네는 유독 동네의 외관을 뒤바꿔버리는 공사가 많았다. 초등학생일 때였던 2003년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밀어붙이던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됐다. 청계고가도로를 따라 형성된 도깨비 시장은 서울풍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버렸고, 처음 자전거 연습을 했던 공터는 청계천문화관이 생겨 없어져버렸다. 중학교에 들어간 2008년에는 왕십리역이 예전의 낡은 모습을 버리고 광장을 포함한 민자역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아파트 건너편에서 뉴타운 공사가 시작됐다.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진행된 뉴타운 공사는 대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기숙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바뀌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고는 했다. 처음 공사가 시작되기 전, 재개발을 위해 철거된 동네의 모습은 전쟁 중 폭격당한 마을의 모습 같았다. 친구네 집, 골목길, 문방구 같은 곳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콘크리트 덩어리와 벽돌, 흙먼지만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처음 그 풍경을 봤을 때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어린 시절의 공간이 통째로 파괴당한 기분이었다. 재개발 덕에 그곳에 살던 친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갔고, 아직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기에 친구들과 연락도 끊겨버렸다. 노을을 가리는 높은 아파트로 가득한 건너편의 뉴타운에서 어린 시절의 공간을 찾을 수 없다. 그 공간은 이제 갈 수 없다.
집이 아닌 곳에서 학교를 다니던 6년 동안 익숙했던 공간은 파괴되고,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었다. 비단 뉴타운만의 일만인 것도 아니다. 졸업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은 어느새 인조잔디가 깔리고 정글짐은 철거당해 예전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는 학생이나 교사가 아닌 외부인은 교정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학교 앞의 문방구도 하나둘씩 문을 닫고 편의점으로 변했다. 몇 시간을 앉아 죽치고 구경하던 오락기도 자취를 감췄다. 동네는 이렇게 어린 시절을 불러오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어떤 공간은 이전의 모습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바뀌었다.
그렇기에 <우리들> 속 공간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이자, 그 어떤 영화보다 밀접한 자기반 영적 심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머릿속 서랍에 담겨있는 기억을 꺼낼 수 있는 열쇠는 기억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물론 <우리들> 속 공간은 내 어릴 적의 공간과 동일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 그 심리를 담아내는 공간은 내 기억을 소환해내는 공간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만약 <우리들> 속 장면이 아닌 누군가가 찍은 영상이나 사진으로 그 공간들을 접했다면 지금과 같은 밀접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유독 <우리들> 속 공간이 밀접하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
영화 속 선이는 당연히 키가 크지 않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등장하는 선이는 딱 그 나이대 아이의 신장이다. 영화 속에서 선이는 자신보다 조금 큰 지아와 보라를 올려다본다. 선이의 눈높이가 화면의 3분의 2 지점에 위치해 있다면, 지아나 보라의 눈높이는 그보다 조금 위에 위치하는 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카메라는 선이의 낮은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때문에 카메라는 골목과 문방구, 운동장 같은 공간을 선이의 낮은 눈높이로 담아낸다. 가령 문방구에서 고가의 색연필을 쳐다보던 선이의 모습, 선이와 한 프레임 안에 들어왔을 때 어깨 위 부분이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어른의 모습 등은 카메라가 선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우리들>의 촬영은 의도적으로 몸을 낮추고 다니지 않는 이상 다시 접할 수 없는 시선의 높이를 구현한다. 그 눈높이로 담아낸 평범한 공간은 순식간에 관객의 어린 시절을 스크린 위에 불러온다.
이런 지점은 어린 시절의 공간을 찾아갈 수 없는,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는 나에게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다. 단순히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눈높이로 보던 공간이 사라지고 ‘재개발’,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던 과정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의 변화는 나의 성격을 대변한다. 집-근무지-집이라는 단순한 루틴을 거부하고 싶으면서도 23년 동안 살아온 동네를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아하는 지금의 나는, 급격하다면 급격한 공간의 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우리들>의 배경이 되는 공간, 선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공간의 향수는 사라지고 변화한 현실의 공간의 추억을 연대기적으로 소환하며 내 기억을 되짚어 보게 만들었다.
<우리들>은 선, 지아, 보라의 이야기와 심리묘사를 통해 관객의 어린 시절을 스크린 위로 불러온다. 영화 속 공간들은 그 심리들이 위치해야 할 곳을 정확하게 잡아낸다. 영화를 보며 스크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 관객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감상을 이끌어내는 큰 이유는 카메라가 담아낸 공간에 있다. <우리들>이 다른 성장영화와 가지는 차이점과, 영화를 본 한국인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스크린에서 나를 본다.’ 이런 영화적 경험을 가능케 한 윤가은 감독과 민준원, 김준현 촬영감독(촬영감독이 두 명이다), 최수인, 설혜인, 이서연 배우에게 감사하고, 동시에 다음 작품에선 어떤 체험을 안겨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