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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3. 2017

부족한 디테일을 우악스럽게 끌고 나가다

화려한 캐스팅 자랑하는 이상일 감독의 신작 <분노>

*스포일러 포함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상일 감독의 신작 <분노>는독특한 구조의 영화이다. 무더운 여름날, 도쿄에서 한 부부가 무참히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경찰은 범인이 피로 써서 남긴 ‘분노’라는 글자와 지문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범인을 쫓는다. 그로부터 1년 뒤, 치바, 도쿄, 오키나와에 각각 연고를 알 수 없는 세 남자가 나타난다. 영화는 세 공간, 세 공간의 인물들을 병렬적 구조로 등장시킨다. 전국에 뿌려진 범인의 몽타주와 묘하게 닮은 세 남자와 그 주변 인물들에 얽힌 이야기로 142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운다. 3편의 단편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은 것 같은 형식을 취하는 영화 <분노>는 도망친 살인자라는 큰 틀의 이야기에 분절된 세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첫 이야기는 치바의 어부 요헤이(와타나베 켄)와 그의 딸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가출해 도쿄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아이코를 집으로 데려오며 시작한다. 아이코가 가출한 사이 마을에 찾아온 의문의 남자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는 자신의 과거를 숨긴 채 요헤이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이코가 그에게 도시락을 싸주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신뢰가 쌓이고 사랑으로 이어진다. 어느 날 방송에 비친 살인범의 몽타주가 타시로와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의심이 심해지고, 결국 아이코가 타시로를 신고하면서 파국을 맞는다. 결과적으로 그들과 전혀 상관없었던 살인범이었지만, 이미 망가진 그들의 모습과 의심이라는 씨앗이 어떻게 파국을 만들어내는지를 묵직하게 담아낸다. 세 편의 에피소드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며, 세 배우의 연기는 찬사를 자아낸다. 그들 자신과 상관없는 외부의 사건이 이미 금이 가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그것은 어떻게 다시 봉합되는지 그려낸 치바 에피소드는 <분노>에서 감정선을 가장 진중하게 전달한다. 서로 반대편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며 도쿄에서 치바로 돌아오던 요헤이와 아이코는, 양 옆에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맞잡은 아이코와 타시로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이야기는 도쿄의 샐러리맨 유마(츠마부키 사토시)의 이야기이다. 게이 데이팅 어플로 만난 나오토(아야노 고)와 하룻밤을 보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이 깊어진 유마는 나오토와 동거를 시작한다. 요양원에서 지내는 어머니를 돌보는 나오토의 모습을 보며 점점 더 사랑이 깊어지는 유마는 어느 날 살인범의 몽타주에서 나오토의 얼굴에 있는 점과 똑같은 점을 발견한다. 동시에 나오토는 연락을 끊고 모습을 감춘다. 유마는 우연히 만나게 된 나오토의 친구에게서 나오토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오토는 고아원에서 자랐고,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남들 모르게 감춰왔으며, 연락이 끊긴 날 공원에서 쓰러져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마가 오열하며 긴자 거리를 걸어가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마무리된다. 유마가 나오토와 사랑에 빠지고, 그 관계를 묘사해가며, 유마가 나오토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까지는 꽤나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하지만 나오토가 사라지고, 그 이유를 유마가 전해 듣는 장면에서 갑작스럽게 쏟아내는 정보들과, 다소 억지스러운 얼굴의 점이라는 설정, 감정을 갑자기 몰아붙이는후반부는 의문점이 남는다. 후반부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급하게 주워 담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야노 고의 좋은 연기가 아쉽게 마무리되었다.

 오키나와 에피소드는 이야기를 이렇게 이끌어 나가는 것이 최선인가 싶었다.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이사 온 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그곳에서 만난 친구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와 무인도 호시 섬에 놀러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배낭여행자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타츠야와 함께 시내에 나간 이즈미는 우연히 타나카를 만나고, 타나카와 저녁을 먹은 뒤 해어진다. 인사하는 사이 술에 취해 어디론가 사라진 타츠야를 찾아다니던 이즈미는 길을 헤매다 미군에게 강간당한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타츠야는 자괴감에 휩싸이고, 타나카는 자신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살인범의 몽타주가 방송을 타고 타나카는 불안증세를 보이다 호시 섬으로도 망친다. 그를 쫓아간 타츠야는 자신도 이즈미를 해코지하려 했다는 타나카의 말을 듣고 분노에 휩싸여 그를 살해한다. 결과적으로 타나카는 도쿄의 살인범이었고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영화의 제목인 ‘분노’라는 테마가 가장 진하게 그려지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인 이즈미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배제되어 있다. 영화는 사건 이후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에서야 이즈미를 등장시킨다. 사건 당사자 대신 주변인의 분노만 담아낸 이야기를 긍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영화의 테마 자체와도 어긋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과하게 길게 남아낸 (심지어 미성년자) 강간 장면과 피해자를 배제한 영화의 진행, 범인을 드러내는 방식까지 장점을 찾아볼 수 없는 에피소드였다.

 3개의 에피소드를 번갈아 가며 진행시키고, 그 사이사이 경찰의 수사과정을 넣는 모습은 과한 디테일로 보였다. 범인 자체에 대한 묘사는 너무 친절했고, 그러면서 범인을 극 후반부에서야 밝히는 선택은 세 에피소드의 감정선 속으로 몰입하지 못하고 조금씩 거리를 두게 만든다. 특히 도쿄와 오키나와 에피소드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려 하면 범인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해 맥을 끊었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경찰 장면을 전부 뉴스로 대체했으면 어땠을지, 범인을 아예 드러내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혹은 시간 순서를 비틀어 세 명이 모두 범인이었다면 어땠을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보며 떠오른 생각의 대부분은 ‘이렇게 했다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하는 상상뿐이었다.


 살인범에 영향을 받는 세 개의 분절된 이야기라는 설정과 분노라는 테마를 버무리려는 시도는 독특하고 신선하게 다가왔다. 후반부의 특정 부분을 제외하고 영화를 가득 채우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하지만 디테일이 부족한 채 설정만으로 142분을 이끌어가려는 시도는 우악스럽게만 느껴져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소화해 내기엔 무리로 느껴진다. 영화를 조금만 더 정돈했다면, 세세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면, 묘하게 겹쳐 보이는 이야기를 하나로 만들었다면 어땠을지, 아쉬움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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