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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24. 2017

클리셰로 담아낸 시대의 메세지

나사의 천재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

 어떤 영화의 만듦새를 이야기할 때, 장르적인 클리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클리셰를 비틀면서 재미를 주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클리셰를 적절히 따라가면서 큰 설정을 바꾸어 신선함을 주는 영화가 있다. 데오도르 멜피의 <히든 피겨스>는 정확히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이다.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이 역경을 딛고 성공하는 전기 영화는 차고 넘친다. 올해만 해도 <핵소 고지> 같은 작품들이 개봉했었다. <히든 피겨스>는 그런 주인공의 인종과 성별을 바꿈으로써 굉장한 신선함을 가져와 앞선 영화들과 차별점을 둔다. 여성 팀 업 블록버스터였단 <고스트 버스터즈>나, 온전한 흑인의 성장영화였던 <문라이트>를 봤을 때 느꼈던 신선함이 <히든 피겨스>에도 녹아있다. 

 이러한 인장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다. 나사(NASA)로 출근하는데 주인공 캐서린(타라지 P. 핸슨), 도로시(옥타비아 스펜서), 그리고 메리(자넬 모네)는 차가 고장 나 길가에 멈춰서 있다. 길 한 복판에 서있는 차로 경찰차 한 대가 다가오고, 그 안에는 백인 경찰이 타고 있다. 보통의 흑인 영화라면 어땠을까? 경찰은 도로 한복판을 막고 있는 흑인의 차량을 불쾌하게 여기고,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내 그들을 체포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히든 피겨스>의 세 주인공은 냉전이 한창인 미국의 나사에서 일한다. 익숙한 패턴으로 그들을 대하던 경찰은, 그들이 나사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자 “스푸크니크가우리 머리 위를 떠다니는 것을 참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빨갱이들보다 먼저 우주를 정복해달라”라고 부탁하며, 그들의 직장까지 경찰차로 에스코트해주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오프닝은, 흑인 영화의 클리셰를 하나씩 뒤집으면서 주류 상업영화 속 전기영화의 틀을 따라가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세주인공이 나사에서 겪는 차별에 대한 묘사와, 그 극복을 묘사하는 과정도 어느 영웅적인 인물의 전기영화에서 보던 그것들과 비슷하다. 그들이 받는 차별은 유색인종 화장실, 해리슨(케빈 코스트너)과 미첼(커스틴 던스트), 폴(짐 파슨스)등의 행동과 대사에서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와 같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주인공의 재능과 노력이고 용기이다. 수학 영재였던 캐서린은 자신의 실력을 해리슨을 비롯한 팀원들에게 서서히 증명해내고, 인종이라는 유리천장에 막혀 승진하지 못하던 도로시 역시 자신의 진가를 상사인 미첼에게 확인시키며, 메리는 법정에서의 감동적인 연설을 통해 불가능이라는 틀을 깨부순다. 웃음과 눈물을 오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뻔하지만 필요한 교훈을 전달하고, 그것은 시대의 목소리에 부응하는 메시지로 작용한다. 가장 대중적인 화법으로 트럼프 시대의 마이너로 여겨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히든 피겨스>의 이야기는, 영화의 흥행이 단순한 서프라이즈가 아님을 증명한다.

 기억하고 싶은 영화 속 순간이 많지만, 공기처럼 퍼져있는 차별을 인식하는 해리슨의 모습, ‘최초’에 대한 이야기를 판사에게 전달하며 승소한 메리의 모습, 짐(메허샬레 알리)가 캐서린에게 청혼하던 아름다운 순간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퍼렐 윌리암스와 한스 짐머가 의기투합한 음악은 적재적소에서 등장해 영화의 격을 올려주고(극 중 가장 달콤한 순간에 들리는 퍼렐의 목소리란), 타라지 P. 핸슨, 옥타비아 스펜서, 자넬 모네 세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호연, 과거의 자료화면과 CG를 적절해 결합해 만들어낸 로켓 발사 및 우주에서의 시퀀스 등은 <히든 피겨스>를 좋은 영화로 완성시키는 요소가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캐서린과 도로시의 이야기에 비해 마무리가 불확실한 메리의 이야기이다. 나사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가 되려는 메리는, 백인 학교를 졸업해야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조건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행동한다. 법정에 청원을 넣고, 승소하여 학교에 입학한 메리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그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존 글렌(글렌 포웰)이 우주비행을 성공한 뒤에 등장하는 자막으로 영화 이후 모습을 담아내며 싱겁게 마무리 짓는다. 127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안에서 메리의 이야기를 조금 더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문라이트>에 이어 (이번에도 번째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좋은 연기를 선보인 자넬 모네의 호연 덕분에 일정 부분 상쇄되는 단점이다.

 <히든 피겨스>는 클리셰에 충실한 전기영화이면서, 인물의 힘을 믿고 강직하게 러닝타임을 이끌어간 영화이다. ‘재미와 감독’이라는 흔하디 흔한 문구로 홍보되는 수많은 영화 가운데서, 관객의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아낼 수 있는 영화는 많지 않다. <히든 피겨스>는 성실하게 이를 수행하면서, 할리우드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낼 영화로 남게 될 것 같다. 당분간 상업영화에 있어서 어떤 소재를 고르고, 소재를 어떻게 다루고, 그것을 적절한 타이밍에 내놓는지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남을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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