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오랜 기간 스크린과 안방을 지키던 배우 한 명이 별세했다. 국민엄마 칭호의 또 한 명의 배우, 1971년 TV 드라마 <수사반장>으로 데뷔한 이후 46년 동안 연기를 놓지 않았던 배우, 암투병으로 고생하던 마지막까지 작품을 마무리하고 가겠다는 프로정신을 보여준 배우. 20대 초반인 내 세대에게는 <카트>, <변호인>, <판도라> 같은 영화 속 어머니 혹은 어르신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132편에 달하는 영화와 드라마 필모그래피(네이버 영화 기준)를 보면 김영애의 연기 스펙트럼은 어머니나 가족의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깃발 없는 기수>를 비롯한 임권택의 여러 걸작부터, 김기영, 이장호를 비롯한 한국 영화계 거장들의 작품, <깊은 밤 갑자기>와 같은 장르영화, <연산일기> 등의 사극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족적을 남겼다. 오랜 세월 많은 작품을 통해 극장에서, 안방에서 관객들과 만나온 김영애의 영화 5편을 골라보았다.
Choice 1. <왕십리> (1976)
감독: 임권택
출연: 신성일, 김영애, 백일섭
임권택의 영화에 김영애가 출연한 첫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김영애는 가족문제로 오랜 기간 외국에 나가 있다 14년 만에 귀국해 왕십리로 돌아온 준태(신성일)의 옛사랑 정희를 연기한다. 준태는 가난한 집의 딸이었던 정희가 14년의 세월이 지나 귀부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희를 찾아간다. 하지만 정희는 자신의 애인 충근(백일섭)과 준태의 돈을 노리는 사기꾼이었다. 이런 극적인 변화를 주도하는 캐릭터를 소화하고, 장르 문법에 알맞은 연기를 선보이는 김영애는 <왕십리>의 완성도를 높여준 일등공신이다. 정희의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출현과 재출현을 반복하는 정희의 캐릭터는 현재와 플래시백을 오가며 다른 두 정희처럼 그려진다. 소주를 병째로 들이켜던 모습과 순진한 귀부인처럼 보이는 정희의 간극을 보고 있자면 김영애가 연기를 통한 캐릭터의 조율에 얼마나 능숙한 지 확인할 수 있다.
Choice 2. <깃발 없는 기수> (1979)
감독: 임권택
출연: 김영애, 하명중, 주현, 고두심, 송재호
임권택과 김영애의 두 번째 만남인 영화이다.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사람 개개인 간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길거리에서는 매일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시위대가 격돌해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는 시대에서 어떤 것을 기사로 내보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회부 기자 윤(하명중)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다. 김영애는 윤의 애인이 되는 행화를 연기한다. 해방 직후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택시 드라이버>처럼 느껴지는 영화 속에서 김영애는 좌익과 우익 어느 자장 안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의 초상을 연기한다.
Choice 3. <깊은 밤 갑자기> (1981)
감독: 고영남
출연: 김영애, 윤일봉, 이기선
김영애의 컬트영화랄까? <깊은 밤 갑자기>는 곤충학자인 남편의 슬라이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목각인형을 본 선희(김영애)가 목각인형의 환영에 사로잡히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얼마 전 해외 유명 블루레이 제작사인 몬도 마카브로에서 한정판으로 제작되고 빠르게 매진되었던 기록이 있는, 국외에서도 컬트적 유명세가 있는 작품이다. 이런저런 장르영화에 출연했던 김영애가 누구보다 앞선 호러퀸이었음을 이 영화에서 증명한다.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장면 속 김영애의 이미지는 관객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는다. 최근 개봉했던 <현기증> 같은 스릴러/호러 장르에 김영애를 캐스팅한 이유를 <깊은 밤 갑자기>에서 찾을 수 있다.
Choice 4. <애자> (2009)
감독: 정기훈
출연: 김영애, 최강희
김영애가 TV 드라마들을 통해 쌓아온 엄마 캐릭터의 결산처럼 느껴지는 영화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뻔하고 여러 차례 그려진 신파극이지만, 김영애라는 배우가 연기하기에 영화가 특별해진다.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됨을 이야기하는 영희(김영애)와, 오랜 시간 갈등과 화해를 반복해온 딸 애자(최강희)의 이야기는 자극적이지 않게 관객의 눈물샘을 건드린다. 오랜 기간 쌓여온 김영애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울림이 가득했던 영화.
Choice 5. <변호인> (2013)
감독: 양우석
출연: 송강호, 임시완, 김영애, 곽도원
김영애의 근작들은 역시나 엄마 캐릭터로 가득하다. <허삼관>, <카트>, <판도라> 등의 영화에서 관객을 울리는 연기를 선보였던 김영애의 최근 영화 중에서 <변호인>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변호인>에서 김영애는 경찰에 의해 폭행당한 아들 진우(임시완)를 보며 마음앓이를 하는 어머니 순애를 연기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송강호)의 단골 돼지국밥집을 운영하며 아들과 살아가는 순애의 모습은 익숙하기에 마음을 울린다. 모든 출연진이 좋은 연기를 보여줬던 영화이지만, 김영애의 연기를 통해 한층 진해진 영화였다.
R.I.P 김영애 (1951.04.21 ~ 2017.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