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8. 2017

도구이자 껍데기로써의 타인, 그리고 나

스파이크 존즈의 괴작 <존 말코비치 되기>

 자아실현이란 무엇인가? 꿈의 실현, 자의식의 실체화, 목표의 설정과 도달…… 연애편지 대필 작가가 OS와 사랑에 빠지는 <그녀>나, 한 소년이 괴물의 나라에서 그들의 왕이 된다는 판타지 <괴물들이 사는 나라> 등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주인공 내면의 욕구를 끌어내는 장치를 동원해 자아를 끌어낸다. 그가 할리우드 최악의 (구리다는 뜻이 아니다) 스턴트 집단인 잭애스의 일원이자 그들의 첫 영화 <잭애스>를 연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연애편지 대필, 판타지 속 괴물의 나라의 왕, 기상천외한 스턴트 모든 것은 영화 속 인물의 자아를 이끌어내는 도구이자, 현실의 자신을 비현실 속에서 보호하기 위한 껍데기로 작용한다. 스파이크 존즈의 데뷔작 <존 말코비치 되기>는 굉장히 직유적인 도구와 껍데기를 사용하고, 그의 다음 영화들에 틀을 잡아준다. 현실 속의 배우인 존 말코비치를 극의 제목과 소재로 사용하고 실제로 말코비치를 출연시키는 대담함은 자아실현과 자기혐오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주인공 크레이그 슈와츠(존 쿠삭)의 이야기를 유려하게 전달한다. 

 크레이그 슈와츠 꼭두각시 인형 예술가이다.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 인형극이기에 길거리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애완동물 가게를 운영하는 아내 로테(카메론 디아즈)는 크레이그에게 취직을 권하고, 그는 신문을 보다 찾은 ‘레터스’ 회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회사에 지원한다. 7과 2분의 1층이라는 기괴한 장소에 위치한 회사에서 서류 정리 일을 하던 그는 우연히 캐비닛 뒤에 있는 작은 문을 발견한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문 뒤의 굴로 기어들어간 그는 15분간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경험을 한다. 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에 매료된 그는 여러 차례 그 통로를 통해 말코비치가 되고, 후엔 자신의 의지대로 말코비치를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제 말코비치의 육체를 통해 맥신(캐서린 키너)과의 사랑을 이어가려 하고, 꼭두각시 인형술사로써 자신의 재능과 예술성을 말코비치의 명성을 이용해 세상에 알리려 한다.


 크레이그는 말코비치가 되어보기 전엔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예술로는 돈을 벌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다 더럽다는 이유로 행인에게 얻어맞기도 한다. 예술을 하기에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혐오는 인형술사라는 이유로 맥신에게 구애를 표했다 거절당함으로써 강화된다. 그랬던 크레이그는 말코비치의 뇌와 연결된 통로를 발견하고 그가 되어본 뒤 어떤 변화를 표한다. 인형을 조종해 감정을 드러내던 그가 인간을 조종하는 궁극의 인형술사가 되었기 때문일까? 말코비치의 껍데기를 덮어쓰는 것에 중독된 크레이그는 그의 뇌를 장악하고 그의 명성을 이용해 인형극 공연을 이어간다. 말코비치의 껍데기는 크레이그의 자아실현 수단이 된다. 동시에그 껍데기 속에 자기혐오를 가둔다. 영화 후반부, 말코비치의 뇌에서 빠져나온 크레이그의 모습은 연결 통로를 발견하기 이전의 크레이그와 동일하다. 아니, 그 보다 더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져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말코비치라는 껍데기가, 도구가 없다면 크레이그의 자아실현은 불가능한 것일까?

 크레이그의 아내 로테 역시 말코비치의 뇌 속에 들어간 이후 변화를 겪는다. 그는 말코비치의 뇌를 체험한 후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다. 로테는 말코비치의 뇌를 체험한 직후 크레이그에게 바로 커밍아웃하고, 말코비치의 껍데기를 통해 맥신과의 애정을 키워나간다. 크레이그가 자기혐오를 바탕으로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실현하려 했다면, 로테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뒤 그것의 실현을 위해 말코비치의 몸을 이용한다.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알게 된 로테는 말코비치의 몸밖에서도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유지한다. 말코비치의 몸을 벗어나면 다시 자기혐오적 태도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크레이그와는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로테에게 말코비치의 뇌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써 작용한다. 영화의 마지막 맥신과 로테의 모습을 크레이그가 아기의 시선에 갇혀 바라보는 모습은, 영화의 권선징악적 응징에 따른 클리셰이지만, 타인의 껍데기를 빌리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이 생긴다. 타인을 자아실현의 도구로, 껍데기로 삼는 것은 전혀 유효하지 않을까? 또한 자아 정체성을 확립에 타인의 영향력이 필요충분조건일까? 영화는 크레이크와 로테가 각각 말코비치와 동일시되면서, 타인/자신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지움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관객에게 넘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메르의 어떤 괴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