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댄서>
“산파가 아이의 유연성 검사를 하려고 다리를 찢는데, 다리가 너무 많이 벌어져서 놀랐어요” 발레계의 악동이자 두 번 다시없을 천재 세르게이 폴루닌의 어머니는 폴루닌을 출산했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신화 속 탄생설화를 연상시키는 비범한 천재의 시작이다. 5살인 폴루닌이 체조로 운동을 시작한 것부터 키예프의 발레학교로 진학해 발레를 익히는 모습, 런던의 로열 발레학교로 넘어가 3년이라 월반을 하는 모습이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초반부는 폴루닌의 ‘탄생설화’가 어떤 전설의 시작이었음을 증명한다. 폴루닌의 몸짓이 보여주는 어떤 예술성이 드러나는 어린 폴루닌의 모습, 같은 연습실의 다른 학생과 눈에 띄게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는 모습 등은 발레를 전혀 모르는 관객까지 그가 왜 천재인지 납득하게 만든다.
세르게이 폴루닌은 <댄서>를 보는 우리와 다른 중력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가 공중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모은 몽타주는 폴루닌이 그를 보는 관객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무대에서 도약한 폴루닌은 홀로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공중에 체류한다. 발레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만큼이나 완벽한 그의 육체가 그려내는 몸짓을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만으로도 기록영화로서 <댄서>의 가치가 증명된다. <댄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은 세르게이 폴루닌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육체, 천부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재능, 발레라는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마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아름다움. <댄서>는 영화를 연출한 스티븐 캔터와 ‘Take Me To Church’ 프로젝트를 함께한 사진작가 데이비드 라샤펠 등이 폴루닌에 매료되었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만 다큐멘터리가 담은 폴루닌의 서사는 굉장히 익숙하기에 아쉬운 점이 남는다. 폴루닌의 학비를 벌기 위해 흩어진 가족, 타국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 폴루닌의 이야기, 힘든 시절을 함께 견디어낸 친구들, 부모님의 이혼 등 극영화였다면 과한 클리셰로 느껴졌을 지점이 영화 속 폴루닌의 서사를 이룬다. 물론 이것은 실화이기에 다큐멘터리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폴루닌은 물론, 그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것 역시 흥미롭다. 다만 폴루닌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가졌을 법한 좀 더 사적인 고민이나 내면을 담아내지 못한 것은 <댄서>의 이야기를 평이하게 만든다. 그의 나이가 한자릿수였을 때부터 20대 후반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가졌을 고민이 가족에 얽힌 것만 있지 않을 거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8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폴루닌의 인생을 압축하려 했지만, 몇몇 지점은 위키피디아의 세르게이 폴루닌 문서를 영상으로 대체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폴루닌이라는 사람이 가진 힘은 강력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폴루닌의 이름을 구글이나 유튜브에 검색해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Take Me To Church’나 그가 은퇴 후 눈밭을 달리며 도약하던 장면의 해방감은 그가 관객과 다른 중력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도약의 순간 그에게 작용하는 중력은 누구보다 약하지만,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에게 지어진 중압감은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지 못했을 강한 중력이다. 그 중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모습이 은퇴 선언을 한 그를 다시 춤추게 만드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천재적인 재능은 그를 속박함과 동시에 해방시킨다. 감독이 보여줬어야 하는 것은 그 재능 자체에 대한 고민이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