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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24. 2017

로메르의 어떤 괴작

 <영국 여인과 공작>은 <녹색광선>, <클레르의 무릎> 등을 연출해온 에릭 로메르의 세 번째 시대극이다. 루시 러셀이 연기한 극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그레이스 엘리엇의 회고록 『프랑스혁명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레이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귀족 여인이고, 프랑스혁명 전에 파리로 넘어온 사람이다. 영화는 장-클로드 드레퓌스가 연기한 오를레앙 공작을 비롯해 그의 사촌인 루이 16세 등과 친분을 쌓고 지내던 열성 왕당파 그레이스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거치는 모습을 담아낸다. 왕당파의 입장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담아냈기에, <영국 여인과 공작>은 <레미제라블> 등 프랑스 대혁명을 다룬 대다수의 영화와 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다. 로메르는 <영국 여인과 공작>이 정치적 문제를 논하는 영화가 아니라 역사의 상황 속에 놓인 한 개인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영화 속에서 ‘야만적’이라고 묘사되는 혁명군의 모습 등은 그레이스와 그 주변 인물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된다.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야외 장면들에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바스티유 궁전이 함락된 1790년의 배경을 설명하는 자막이 당시의 회화처럼 느껴지는 그림과 함께 등장하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림 속 사람들이 움직이면서 영화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배우들은 블루스크린 앞에서 연기하고, 그림을 합성한 영화의 야외 장면들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 거리를 그린 회화가 움직이는 것만 같다. 이런 묘사는 실내 장면에서도 이어진다. 회화적인 구도의 화면은 야외 장면과 함께 영화의 시공간을 이상하게 비튼다. 디지털로 촬영해 CG로 그림을 입힌 영화를 35mm 필름으로 관람하는 체험은 영화의 시간성을 과거와 현재 어딘가에 배치시킨다. 영화가 다루는 시간적 배경은 1790~1793년의 파리이지만, 그레이스의 행동과 감정은 시대에 박제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이 중요한 축을 이루는 이야기이지만, 인물 자체는 시대와 공간 속에 붙박여 있지 않게 된다.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특수효과는 오히려 사실성을 제거한다.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역사 저널처럼 영화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비사실적인 영상은 그레이스 개인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다. 결론적으로 그레이스와 오를레앙은 로메르의 다른 영화 속 인물들과 비슷한 인물로 그려진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화 속에서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왕당파인 그레이스는 정치적 견해차를 보이는 오를레앙 공작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고, 루이 16세의 사형 투표를 놓고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정적에게 둘러 쌓인 오를레앙의 상태, 혁명의 분위기에 따라 파리와 근교의 집을 오가야 하는 상황, 자신과 친밀한 관계인 프랑스 귀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레이스가 느끼는 언제든지 끌려가 단두대에 머리를 집어넣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간다. 영화는 다른 로메르의 영화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예의를 갖춘 대화를 나눌 줄 아는 부르주아 계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존인물을 다룬 시대극이지만 로메르의 현대극의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로메르스러운 영화이다. 그의 수작보다는 괴작에 가까운 이 영화는 어떤 흥미로움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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