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 프랜차이즈 신작 <에이리언: 커버넌트>
*스포일러 포함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은 걸작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가 뒤이어 만든 영화들도 (호불호와는 별개로) 각자의 개성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었다. 1998년의 <에이리언 4> 이후 명맥이 끊겨있던 프랜차이즈를 다시 가동한 것은 시리즈의 창조주 리들리 스콧이었다. 2012년 프리퀄 아닌 프리퀄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연출했고, 그 영화를 통해 인류의 창조주와 에이리언 종족의 등장을 알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조금 더 상세한 에이리언의 기원을 그린다. 프랜차이즈의 창조주인 리들리 스콧이 창조주로써의 자의식을 마음껏 드러낸 영화랄까?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탐사선 프로메테우스를 보낸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욕구와, 웨이랜드의 창조물인 A.I.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그를 보고 키운 창조의 욕망은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을 에이리언의 세계관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전자의 욕구를 담았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후자의 욕망을 담았다. 다만 SF 호러 장르로의 회귀와 리들리 스콧의 욕망은 종종 엇나가면서 영화 전채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1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영화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엘리자베스 쇼(누미 라파스)와 함께 엔지니어의 함선을 타고 떠난 데이빗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엔지니어의 행성에 도착하고, 검은 액체를 뿌려 그곳의 생명체를 학살함과 동시에 그들을 숙주로 삼아 에이리언들을 탄생시킨다. 함선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데이빗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플래시백 시퀀스는 창조주의 전지적인 시점에서 진행되는 재앙-창조의 스펙터클을 담아낸다. 프랜차이즈의 기원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고, 창조했음을 알리려는 과시적인 장면이다. 마이클 패스벤더를 데이빗과 신형 A.I.인 월터로 분리하고, 데이빗이 월터를 파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창조주가 되려는 리들리 스콧의 마음이 엿보인다. 인간이 가진 어떤 절제, 선함을 상징하는 월터를 데이빗과 같은 형상으로 설정한 뒤 데이빗이 그를 파괴하게 되는 전개는,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데이빗의 행동과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이 뒤섞인 장면이다. 이런 경향은 데이빗이 바그너의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들으며 커버넌트호 안의 태아 보관실로 들어가 냉동된 페이스 허거의 유충을 보관함에 넣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바그너의 음악을 블록버스터 크리처 영화에 녹여내는 것은 물론, 연출자의 자의식을 1억 달러 예산의 블록버스터에 과시적으로 집어넣을 감독이 또 있을까? 그 결과물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리들리 스콧의 뚝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데이빗과 월터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납작해지고, 어느 부분에선 납득하기 힘든 대사와 행동을 이어간다. 포스터 상 주인공이었던 대니얼스(캐서린 워터스틴)의 존재감은 미미한 수준이고, 그의 연인이자 선장인 제이크는 왜 제임스 프랭코라는 이름값을 사용했는지 모를 정도로 짧은 분량 동안 출연한다. 제이크의 뒤를 이어 선장이 된 오람(빌리 크루덥)의 행동은 ‘저 사람이 어떻게 식민화 프로젝트의 선원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을 남긴다. 테네시(대니 맥브라이드) 등 다른 선원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2000명의 냉동인간과 1000여 개의 태아를 운송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마저도 창조주의 관점에서 캐릭터들을 소비한다는 리들리 스콧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관객이 마음 둘 캐릭터 하나 없이 영화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SF 호러 장르로서의 기능을 반감시킨다.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는데 어떻게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네오모프의 탄생처럼 몇몇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 있지만, 그 장면들은 그저 잔혹하고 끔찍하기만 할 뿐 공포스럽지는 않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제노모프와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네오모프의 모습은 기괴하지만 공포보단 스크린에서 만나 반갑다는 감정이 먼저 피어오른다.
결국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사이에 존재하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과정을 압도적인 비주얼을 동원해 보여주던 <프로메테우스>의 철학적 면모는 SF 호러 장르에 희석되었고, SF 호러 장르가 지녀야 할 기괴함과 공포, 서스펜스 역시 리들리 스콧의 과시적인 연출이 파묻혀버렸다. 애매한 자리에 위치한 이 영화는 관객의 상상에 맡겼을 때 가장 재미있었을 부분을 프랜차이즈의 창조주가 경전에 새겨버리는 영화다.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과도한 간섭은 오히려 흥미를 떨어트린다. 프랜차이즈를 마무리 짓는 적절한 시점을 놓쳐버린 영화의 결과물은 그저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