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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0. 2017

언노운한 존재가 가시화되어야 하기에

다르덴 형제의 신작 <언노운 걸>

 <로제타>, <아들>, <자전거 탄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 등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와 노동,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형제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이 이민자 이야기를 녹여낸 <언노운 걸>을 연출했다. 임시진료소에서 일하는 의사 제니(아델 에넬)는 다음 날이면 큰 병원으로 일터를 옮길 예정이다. 진료를 마감하고 병원을 정리하던 중 어떤 소녀가 병원의 벨을 누른다. 진료시간이 지났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제니는 다음 날 경찰에게서 그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제니는 신분증도 없기에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알 수 없는 소녀의 사진을 보고 자신이 문을 열어주었다면 소녀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느낀다. 이에 제니는 소녀의 사진 한 장을 들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소녀의 이름을 찾으려고 한다. 

 다르덴 형제의 첫 장르영화라고 할 수 있는 <언노운 걸>은 기본적으로 추리극의 모습을 띠고 있다. 죽은 소녀의 이름은 무엇인지, 자신의 주변 인물부터 새롭게 등장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인물에게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탐색해가는 제니의 이야기는 추리 스릴러의 장르적 컨벤션을 그대로 따라간다. 여기에 다르덴 형제의 터치가 보이는 지점은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이민자에 대한 시선이다. 임시진료소에서 일하며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꼈던 제니는 소녀를 찾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차가운 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면은 공동체 외부의 사람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드러난다. 쉽게 타자화되고 대상화되는 이민자는 공동체 내부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빈곤층이 되며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정착하기도 쉽지 않다. 공동체 내부로 들어오지 못한 채 겉을 떠도는 사람들은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에게 그저 ‘언노운’한 누군가일 뿐이다. 제니가 만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될걸 왜 쑤시고 다니느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이민자란 가시화된 존재가 아닌 ‘언노운’한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제니가 느끼는 죄책감은 여기서 출발한다. 소녀가 처음 벨을 눌렀을 때 초인종 화면을 통해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았던 제니는 CCTV에 찍힌 소녀의 얼굴을 보고 소녀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가시화된 소녀의 존재는 제니가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소외시켜온 사람이다. 제니가 소녀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사람들은 불편해한다. 누군가는 제니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고, 폭력으로 제니를 쫓아내기도 한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소녀가 그 상태 그대로 ‘언노운’한 상태이기를 바란다. 제니가 보여준 사진으로 인해 소녀의 존재가 가시화되자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안해진다. 영화의 제목인 <언노운 걸>은 역설적으로 영화 속 소녀와 같은 존재가 ‘언노운’해서는 안 되는, 가시화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다르덴 형제의 첫 장르영화이기에 그런 것일까. 106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임에도 조금 늘어지는 중반부가 아쉬웠다. 영화 전체가 제니 한 사람만을 집요하게 따라가기 때문에, 음악 조차 사용하지 않는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이 조금은 느릿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다르덴 형제가 언제나 영화를 통해 말해오던 소외받는 사람의 이야기는 <언노운 걸> 속에도 녹아 있다. ‘언노운’의 존재들이 가시화되고, 공동체 속의 모두와 평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다르덴 형제와 영화를 본 관객들이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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