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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3. 2017

차라리 퀴어 누아르를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 진출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스포일러 포함


 차라리 퀴어 누아르였다면 어땠을까? 한준희 감독의 <차이나타운>이 단순히 주인공의 성별을 반대로 뒤집은 것만으로 극의 신선함을 불어넣었듯이,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도 비슷한 변화를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내부자들>의 흥행으로 시작된 브로맨스 열풍은 비슷한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거론되는 수많은 영화들을 거쳐 최근 <프리즌>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 달 등장했다. 우정, 사나이의 의리, 돈과 권력으로 얽힌 관계, 가족애, 동지애 등으로 묶인 남성들의 브로맨스는 건설과 배신을 거듭하고 <아수라>에서 산산이 조각나기까지 했다. ‘브로맨스’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새로울 이야기가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러던 와중 칸 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변성현 감독의 <불한당>을 보게 되었고, 여전한 브로맨스 서사에 넌더리가 났다. 동시에 브로맨스가 아닌 로맨스에 가까운 한재호(설경구)와 김현수(임시완)의 감정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교도소에서 만난 재호와 현수는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가까워진다. 결정적인 사건은 현수의 어머니가 사망하는 사건이다. 아버지는 본 적도 없이 어머니와 둘이 자란 현수에게 어머니는 모든 것이다. 잠입 경찰로서 교도소에 들어가 재호의 마약조직을 소탕하려는 계획에 동참하는 이유도 천 팀장(전혜진)이 어머니에게 이식할 신장을 구해준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재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현수는 자신이 경찰임을 털어놓게 된다. 그렇다. <무간도>와 <폭풍 속으로>에서부터 <신세계>에 이르기까지 반복되는 잠입 경찰이 범죄조직의 인물과 정이 붙는다는 이야기가 <불한당> 서사의 줄기가 된다. 그리고 둘의 관계는 병갑(김희원)의 대사처럼 “둘이 정분이라도 난” 수준으로 발전한다. 영화가 후반부로 다가갈수록 둘의 관계는 멜로드라마 속 갈등 구조에 가까워진다. “사람을 믿지 않고 상황을 믿는다”는 재호의 대사는 평생의 세월 동안 쌓아온 자신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현수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다.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재호의 넥타이를 고쳐주는 현수의 모습은 또 어떤가. 현수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 재호임을 알았을 때 그것을 뒤늦게 알려주어 수사에 그를 이용한 천 팀장을 죽일 기세로 달려든다. 그러나 재호에게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듯이 (현수의 입장에서, 수사의 일환인 듯 포장된) 둘만의 장소에서 만날 것을 권하고, 재호는 다른 경찰을 모조리 죽임으로써 화해의 뉘앙스를 풍긴다. 70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캡틴 아메리카와 윈터 솔저의 우정 따위는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그야말로 애정에 단계가 아니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감정선에 영화는 도착한다. 

 재호의 입장에서, 현수의 입장에서 한 두 차례 반복되는 보이스 오버는 누아르 영화의 그것이라기 보단 멜로드라마 영화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둘의 즐거웠던 한 때’를 떠올릴 때 재호의 표정은 <신세계>의 정청-이자성의 감정선보다 진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영화 속에서 애정이 아니고서야 이해할 수 없는 선택들이 여럿 존재한다. 영화는 그러한 선택들을 ‘브로맨스’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소음은 재호와 현수의 감정선에서 관객을 멀어지게 만든다. 영화 중간중간 조금씩 끼어드는 병갑의 에피소드는 인물들의 관계에 불필요한 맥거핀이 되어,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만든다. 마약조직과 경찰 조직 사이에서 둘의 브로맨스적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 관계를 넘어선 감정선을 드러내는 <불한당>의 이야기에선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한다.


 <불한당>은 홍보 단계에서부터 누아르 영화 속 흔한 잿빛의 색감을 벗어나 개성 넘치는 촬영과 비주얼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새빨간 스포츠카와 새파란 하늘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등장하고, 칙칙한 검은 자동차들과 검은 양복, 룸살롱과 싸구려 나이트클럽으로 가득한 설정은 어느 정도 벗어난다. 이따금씩 쇼트와 쇼트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이 재기 발랄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것 자체를 유머로 활용하는 장면들은 재치 있다. 그러나 액션 연출에 있어서 과시적인 촬영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가령 영화 중반부 채 선장의 사무실에서 패싸움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설경구를 따라 수평으로 이동하던 카메라가 2층 난간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완전히 누워버린다. 이런 부분은 짧지만 액션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맥을 끊어버린다. 롱테이크에 대한 과도한 집착처럼 느껴지면서 <레이드 2>나 <SPL2> 같은 영화에서 등장한 좁은 공간 속 유려한 롱테이크들과 직접적으로 비교된다. 이어지는 테이크에서 내동댕이쳐진 현수와 카메라가 함께 날아가는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그 장면뿐이다. <불한당>을 보고 나니, 한국영화 속 액션은 개싸움을 다양하게 촬영하는 것 이외의 방식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희원과 김성오 캐스팅 덕분에 자연스럽게 <아저씨>가 떠올랐는데, (<불한당>의 오프닝은 <아저씨>의 후일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010년의 <아저씨> 이후 기억에 남는 한국 영화 속 액션이 있었냐 하면 새하얀 백지가 먼저 떠올라버린다.

 재호와 현수 외에 주목할만한 캐릭터는 전혜진이 연기한 천 팀장이다. 천 팀장은 극 중 (대사도 제대로 없는) 현수의 어머니를 제외하면 유일한 여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첫 등장부터 고 회장(이경영)과 병갑 등을 말로 압도하는 천 팀장의 모습은 ‘걸 크러쉬’를 대놓고 노리고 만든 캐릭터임을 분명히 한다. 걸쭉한 욕설이 섞인입담은 <더 킹>에서 김소진이 연기했던 안희연 검사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 보다 많은 분량으로 등장하는 천 팀장은 극 초반에는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지지만, 극 후반으로 갈수록 수많은 브로맨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과 똑같은 캐릭터로 전락한다. 물론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은 반겨야 할 일이다. 하지만 현수에게 출소 선물이랍시고 여자를 붙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영화에서 천 팀장의 캐릭터는 “여성 캐릭터 하나쯤은 넣어주지”라는 시혜적인 태도로 밖에 읽히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불한당>은 한국 브로맨스 영화의 클리셰(회장으로 이경영이 등장하는 엄청난 클리셰 범벅)를 잔뜩 끌어안았지만, 극의 감정성은 퀴어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괴상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개성 있는 비주얼을 추구했으나 결과적으로 아쉬웠던 촬영과 액션,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여성 캐릭터에 대한 불편함이 더해져 아쉬운 작품으로 남고 말았다. 임시완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랄까. 다만 그의 마스크와 연기, <미생>에서도 돋보였던 특유의 소년성이 이런 장르에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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