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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y 16. 2017

실화 속 인물이 실화를 재현할 때의 아우라

재개봉한 에미넴의 영화 <8마일>

 힙합 팬 중에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있을까? 힙합 혹은 래퍼를 소재로 삼은 영화 중 가장 유명하면서 클래식으로 손꼽히는 영화, 에미넴에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보다 먼저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준 영화, <8마일>이 개봉 15주년을 맞아 국내에 재개봉했다. 알렉스 역을 맡은 브리트니 머피와 연출을 맡은 커티스 핸슨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금, 극장에서 <8마일>을다시 만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이벤트로 다가왔다. 디트로이트의 백인 동네 8마일에서 엄마의 트레일러에서 살던 백인 청년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랩스타가 된다는 에미넴의 실화를 에미넴이 직접 연기한다는 기똥찬 기획의 영화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관람해도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비롯해 온갖 시상식을 휩쓴 희대의 명곡 ‘Lose Yourself’가 흘러나오는 엔딩에 감탄하지 않을 관객이 있을까? 

 영화는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 불리며 엄마 스테파니(킴 베이싱어)의 트레일러에서 머물고 있는 래빗(에미넴)은 자신의 친구 퓨쳐(메키 파이퍼)가 MC를 보는 랩 배틀 대회에 참가한다. 긴장감에 헛구역질까지 하던 그는 결국 랩을 하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온다.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친구 윙크(유진 비어드) 그는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알렉스(브리트니 머피)와의 관계 때문에 그마저도 녹록하지 않다. 다시 랩 배틀 무대에 오르게 된 래빗은 그를 적대시하는 크루 프리월드의 수장 파파 독(안소니 맥키)과의 배틀을 벌인다. 트레일러에서 살다가 디트로이트의 랩 올림픽에서 2위를 차지하고 닥터드레의 눈에 띄어 메이저 씬에 데뷔하게 된 에미넴의 이야기를 영화에 맞게 재구성한 <8마일>의 이야기는 뻔해 보인다. 하지만 실화의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연기할 때의 아우라와, 에미넴의 압도적인 랩 실력이 만들어내는 후반부 랩 배틀의 카타르시스는 압도적이다.


 <요람을 흔드는 손>, <LA 컨피덴셜> 등의 작품을 만들어 오던 커티스 핸슨 감독은 래빗의 이야기를 건조하게 담아낸다. 격앙된 톤으로 시궁창 같은 삶에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오직 래빗이 무대에 서있을 때뿐이다. 물론 극 중간중간 주먹이 나가고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그러나 낙후한 디트로이트의 폐건물들과 자꾸만 시동이 꺼지는 낡은 차량, 콘크리트와 벽돌 빛깔이 기저에 깔린 색채의 비주얼 등은 영화의 분위기를 건조하고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래빗의 감정은 차근차근 쌓여 파파 독과의 배틀에서 폭발하고, 배틀 이후 뒷골목으로 걸어가는 래빗의 뒷모습에 영화의 주제곡인 ‘Lose Yourself’가 깔리는 엔딩은 래빗의, 에미넴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실화 속 인물이 실화를 재현할 때의 아우라는 음악과 함께 엔딩 크레딧가 끝나기 전까지 극장 밖으로 나가는 관객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녹음 트레일러에서 원테이크로 녹음을 마쳤다는 ‘Lose Yourself’는 영화의 완성도를 뒤흔드는 강력한 곡이다. 마지막 랩 배틀을 준비하는 래빗의 모습 뒤로 곡의 스케치가 깔리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이처럼 <8마일>은 음악의 활용이 굉장히 뛰어난 장면이다. 8마일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탄 래빗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종이에 라임을 끄적이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래 ‘8 Mile’의 스케치 역시 ‘Lose Yourself’의 등장과 같은 맥락의 쾌감을 제공한다. 기존곡들의 활용도 뛰어나다. 영화의 오프닝과 마지막 랩 배틀의 비트로 등장하는 맙 딥의 ‘Shock Ones Pt.II’, 래빗과 친구들이 차로 이동할 때 듣는 노토리어스 B.I.G의 ‘Juicy’, 그 밖에 등장하는 우탱 클랜의 ‘C.R.E.A.M’과 ODB의 ‘ShimmyShimmy Ya’ 등이 적재적소에 등장해준다.


 재개봉이기에 15년 전 정식 개봉 때의 구린 자막과는 다른, 좀 더 개선된 자막을 기대했다. 그러나 랩 배틀 가사의 번역은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고, 전체적인 번역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한국어로 어색하게 라임을 맞춘 번역은 유치했고 많은 맥락이 제거된 자막은 그저 욕설만 남았다. 재작년에 개봉했던 N.W.A의 전기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의 경우, 힙합평론가 김봉현이 번역하고 래퍼 도끼와 더콰이엇이 감수를 맡아 만족스러운 자막의 퀄리티와 나름의 홍보효과를 얻은 적이 있다. 래퍼 나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타임 이즈 일매틱> 역시 김봉현의 번역과 래퍼 타블로의 감수로 질 좋은 자막을 선보였었다. <8마일> 재개봉에 경우 이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크게 느껴젔다. 또한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는 희대의 초월 번역은 단순한 직역 대사로 바뀌어 작은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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