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16. 2017

복잡다단한 인간의 결을 탐구하는 스릴러이자 블랙코미디

자신의 귀환을 알리는 폴 버호벤의 신작 <엘르>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시작되면 암전 된 화면 위로 식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화면이 들어오자, 바닥에 눕혀진 미셸(이자벨 위페르)가 보이고 검은 옷과 스키마스크로 자신을 가린 강간범이 미셸 위에 올라타 있다. 범행을 마친 강간범이 자리를 떠나자 미셸은 부서진 식기를 치우고 목욕을 하고 저녁에 그녀를 찾아온 아들 뱅상을 맞이한다. 충격적인 오프닝으로 시작한 영화는 (후에 이유가 밝혀지긴 하지만) 경찰에 신고하거나 감정적으로 무너진 미셸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충격적인 사건을 견디어내는 강인한 여성상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지도 않는다. 강간 피해자 여성을 그려내는 스테레오 타입을 완전히 벗어나는 폴 버호벤의 <엘르>는 제목처럼 그녀, 미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의 외부서사는 강간범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미셸의 이야기인 것처럼 진행된다. 강간범은 그녀를 몇 차례 더 찾아오기도 하고, 식사자리에서 가까운 지인을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녀가 대표로 있는 게임회사에선 게임 캐릭터가 괴물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에 미셸의 얼굴이 합성된 영상이 유포되기도 한다. 최루액과 함께 도끼를 구입하고 부하직원에게 권총 쏘는 법을 배우는 미셸의 강간범을 찾아내어 잔혹한 복수를 실행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미셸의 관심하는 강간범을 찾는 것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미 미셸의 삶에는 그녀에게 크고 작은 걸림돌과 고민이 되는 사건들이 존재하고, 폴 버호벤의 시선과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것들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미셸이 겪어온 일들이 드러나고, 카메라는 그간 거쳐 온 사건들이 어떻게 지금의 그녀를 구성하게 되었는지를 진득하게 담아낸다. 


 미셸이라는 인간에게는 당연하게도 여러 결이 존재한다. 여성, 철없는 어머니의 딸, 망나니 같은 아들의 어머니, 사장, 거대한 집에 고양이와 함께 사는 중년, 사이코패스 살인마 아버지의 딸, 친구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 강간 피해자…… 그리고 그녀가 가진 여러 결에 따라 등장하는 사건들, 여성혐오적 농담을 던지는 친구,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사람들이 미셸을 바라보는 시선, 그녀의 게임회사에서 벌어진 사건, 철없는 아들과 어머니의 연애와 결혼 문제 등이 당연하게도 이어진다. 미셸이 수많은 결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단 하나의 사건에만 매몰될 수 없고, 영화는 그것을 당연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영화는 미셸이 가진 많은 결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하나씩 뒤집고 이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한 인간을 드러낸다. 가령 불륜관계에 있던 로버트와의 관계에서 성적인 것을 주도하던 것은 로버트였지만 관계 자체를 주도한 것은 미셸이다. 회사의 대표임에도 여성이기에 남초 집단인 게임회사에서 무시당하던 미셸은 자신을 합성한 영상을 전송한 직원을 찾아 자신의 앞에서 바지를 내리게 한다. 

 이러한 면모는 강간범의 정체를 알게 된 후에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강간범의 정체는 자신이 호감을 품고 있던 앞집의 유부남 패트릭이었고, 이후 둘의 관계는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의 성관계로 넘어간다. 미셸은 자신의 욕망과 쾌락에 충실하며, 사회가 정의하는 무언가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살아가지 않고 그것들을 뒤집어가며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한다. 살인마 아버지 때문에 무너진 삶을 재건해온 미셸의 삶과 재건이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에 찾은 쾌락은 수치와 천박의 경계선에 서있다. 경찰과 언론, 사회에 대한 불신을 가진 미셸은 본인의 삶에만 관심이 있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어쩌면 당연한 미셸의 태도는 모순되면서도 복합적인 그녀의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미셸은 레스토랑에서 여성혐오적 농담을 뱉는 전남편 리처드의 언행을 지적하고 이를 불편해하는 내색을 비춘 웨이트리스와 눈빛을 교환한다.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페미니스트 여성의 모습이다. 장소가 변경된 다음 시퀀스에서, 갑자기 3D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화면이 튀어나온다. 괴물에게서 촉수가 뻗어 나와 여성 캐릭터를 덮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는 미셸의 게임회사에서 제작하는 신작 게임의 시연 영상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여성 캐릭터의 신음소리가 부족하다며 이를 더 높일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녀의 앞선 행동과 대치되는 게임의 내용은 관객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동시에 미셸이 찾은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미셸은 자신의 욕구, 욕망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단순히 말해 거슬리는 것을 구분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다.

 영화 속 공간들에 많은 메타포가 들어 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공간은 회사 속 미셸의 사무실이다. 사무실 창문 밖으로 일하는 직원들과 그들의 모니터가 훤히 보이는 그 공간은 블라인드 하나로 가려지는 공간이되기도 한다. 불륜관계에 있는 로버트와 은밀한 행위를 나누는 공간이기도, 수치스러운 동영상이 회사 전체에 유포된 것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인 미셸의 사무실은 (대사에서도 드러나듯) 수치와 천박함 사이에 있는 자신의 쾌락을 드러내는 공간이 된다. 오프닝의 사건처럼 수치의 순간이 된 영상 유포 사건은 권력관계가 뒤집혀 미셀의 욕구와 쾌락을 채워주는 도구가 된다. 그것을 천박하다 말하는 사람도 영화 속에 존재하지만, 미셸은 블라인드 하나로 이러한 목소리를 가려버린다. 

 영화 속 큰 줄기인 강간범의 사건은 영화 속에서 종결되지만, 미셸의 삶에 들어온 많은 사건들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이를 확실히 드러낸다. <엘르>는 폭풍처럼 무엇인가가 밀려들었다가 잠잠해지는 영화가 아니라, 크고 작은 폭풍과 돌풍이 계속해서 몰려왔다 사라지는 그녀의 삶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폴 버호벤은 자신이 네덜란드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온 스릴러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의 서스펜스와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심지어 샤브롤의 페르소나 중 한 명인 이자벨 위페르가 <엘르>의 주연) 식탁의 부르주아가 나누는 대화 속 블랙코미디를 통해 이를 드러낸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독립적인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톤은 정반대지만) 이자벨 위페르의 전작 <다가오는 것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최전선에 서있던 네덜란드 감독이 유럽으로 복귀한 지 10년이 지나 만들어낸 <엘르>는 폴 버호벤 감독이 자신의 진정한 복귀를 알리는 걸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대사 없이 만들어내는 정서의 정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