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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2. 2017

교과서적인 지식만 남은 영화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

 ‘고증에 충실한 실화입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한다.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들이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정도의 뉘앙스만 풍기는 것과는 달리, <박열>은 영화 속 사건이 실화에 충실한 재연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영화의 주인공인 박열(이제훈)과 후미코(최희서)의 태도와 맞닿아 있는듯한 당당함은,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나키스트 그룹 불령사를 조직해 활동하는 박열은,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자 이를 덮기 위해 일본 정부에 의해지목된 사람이다. 극 중 등장하는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의 대사처럼 “조선인에겐 영웅이고 일본인에겐 원수인 사람”이 바로 박열이다. 영화 <박열>은 대지진 이후 박열이 투옥되고 대역죄로 재판받는 과정을 담아낸다.

 전작 <동주>에서 관객들이 주목한 역할은 송몽규였다. 윤동주가 일제강점기의 문인이자 지식인이고 한 개인으로써 가지고 있던 부끄러움을 고백할 때, 그러한 부끄러움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로 존재했던 것이 송몽규였다고 영화 <동주>는 이야기한다. <박열> 역시 제목은 박열이지만 관객의 눈길은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후미코에게 가게 된다. 도쿄에서 사는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조선인으로써 일제 정부와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라는 노선을 택하게 된 박열이라는 캐릭터도 흥미로운 캐릭터이지만, 부모에게 버림받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넘어가 식모살이를 하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극 중 표현을 빌리자면) 참혹한 삶을 살아온 아나키스트 후미코의 캐릭터가 가진 입체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단순히 박열이 고된 투옥생활과 재판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애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박열과 동등한 동지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활동한 활동가로 묘사된다. 이는 후미코와 박열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맺은 동거 서약을 통해 제시된다. 동지의 관계에서 함께 살아갈 것, 활동할 때는 여성이 아닌 동지로 볼 것 등이 적혀있는 동거 서약은 극 중 몇 차례 제시된다. 박열이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도구가 됨과동시에 후미코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소재이다. 

 하지만 129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로써, <박열>의 이야기는 늘어지고 종종 지루해진다. 영화는 초반의 관동대지진 이후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신문과 면회, 재판 등으로 진행된다. 때문에 영화의 전개를 담당하는 것은 행동이나 카메라가 아닌 대사이다. 때문에 수 차례 반복되는 신문 과정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늘어지고, 실없어 보이는 유머 몇 가지로 지루함을 조금씩 달랠 뿐이다. 게다가 박열과 후미코의 (멜로드라마라기보단) 로맨틱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의 톤은 종종 영화를 너무 가볍게 만든다. 때문에 조선인 학살을 박열 사건으로 덮으려는 일본 정부의 모습 등까지 가벼워 보이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무대신 미즈노를 비롯한 일본 관료들의 과하게 아둔한 모습들은 영화의 긴장감마저 지워버린다. 박열과 후미코의 이야기, 그들이 아나키스트 노선을 택하게 된 이야기, 조선인을 탄압하려는 일본 정부의 모습, 박열의 조직 불령사의 이야기 등 다루려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보니 늘어지는 부분도 존재한다.

 생각보다 긴 러닝타임과 늘어지는 이야기를 붙잡아주는 것은 배우들의 공이 크다. 이제훈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좋았지만 (사실 <탐정 홍길동>의톤과 너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최희서의 연기는 <박열>을 봐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극 중 파트너인 이제훈의 약간은 과장된 연기톤에 맞춘 연기를 최희서가 선보이는데, 영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면서 후미코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연기가 감탄을 자아낸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서 짧은 조연으로 출연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연기를 보여준다. 입체적이면서도 과감한 최희서의 연기를 통해 박열의 이야기까지 이해하게 된다. 아쉬운 것은 내무대신 미즈노를 연기한 김인우를 비롯해 일본인 배역을 연기한 한국인 배우들이다. 어눌한 한국어와 유창한 일본어를 가뿐히 넘나들던 최희서의 연기와 비교되었기 때문일까, 혹은 그들이 한국인 배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일까? 배우들의 연기는 일본인을 보고 있다기보다 일본어로 연기해야 되는 한국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본인 배역에, 특히 일본어 대사로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는 배역에 일본인을 캐스팅하는 대신 한국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박열>은 이제훈과 최희서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관람하기에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고 관객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라고 하기엔 의문이 남는다. 윤동주 시인의 부끄러움을 통해 현재의 시대를 통찰했던 전작의 총명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영화를 보고 남는 것은 박열과 관동대지진에 대한 교과서적인 지식과 최희서의 존재감뿐이다. <동주>를 보며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이준익 감독의 시선과 통찰에 감탄했기 때문인지, <박열>이라는 결과물은 생각해볼수록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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