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
3억 달러짜리 쓰레기는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든다. 영화의 산만함이 악취처럼 관객의 호흡기관을 공격하는 기분이다. 새로 나온 마이클 베이의 값비싼 쓰레기는, 기존의 <트랜스포머>가 가진 장점은 물론, <스타워즈>, <에이리언>, <토르>처럼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좋아했을 영화들과 [철권] 등의 게임에 이르는 하위문화의 모든 장점을 취해 최악의 결과물로 탈바꿈시킨다. 마이클 베이와 작가진의 취향을 폭력적으로 뒤섞은 농담과 비주얼의 홍수는 끔찍한 악취로 가득한 시궁창을 연상시킨다. 올해 여러 블록버스터들이 개봉했고 <킹 아서>, <파워레인저스>,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등에 혹평이 쏟아졌지만, 각 영화에서 일말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일말의 장점도, 즐거움도, 화려함도 없다. 전작 <트랜스포머: 종말의 시대>가 <트랜스포머> 프랜차이즈의 최하점을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최하점을 기록한다. 이야기는 부재하다 못해 부서진 파편들을 주사위 던지기로 순서를 정해 줄 세운 것 같고, 3억 달러가 투입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카메라가 부족했나’라는 생각이 드는 촬영이 이어지며, 시리즈의 유일한 존재 의의였던 CG 폴리곤 덩어리의 퀄리티마저 퇴보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서 왕 시대, 멀린의 마법은 트랜스포머가 가진 외계의 힘이었고 그것이 응축된 지팡이가 멀린과 함께 묻혔으며, 지팡이의 힘을 통해 사이버트론을 재건하려는 디셉티콘의 공격을 케이드(마크 월버그)와 오토봇이 막는다. 사실상 3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한 회 정도에도 담길법한 이야기이다. 15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이끌어갈 이야기가 아니다. 감독과 작가진은 오로지 러닝타임을 채우기 위해 불필요하고 너저분하며 여성혐오적인 농담을 쑤셔 넣고, 불필요한 캐릭터와 대화들을 집어넣으며 관객의 시간을 낭비한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만들랬더니 정말로 관객의 시간을 살해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했던 4명의 꼬마들은 중요한 인물처럼 그려놓고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들을 구출하며 등장한 이자벨라(이사벨라 모너) 역시 영화의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필요에 의해 갑작스럽게 재등장한다. 멀린의 후예랍시고 등장하는 비비안(로라 하드독)의 등장은 어처구니가 없으며 영화 중반에 갑작스럽게 캐릭터가 생겨난다. 스토리상 중요하게 여겨지는 캐릭터를 갑작스레 등장시키는 방식을 보고 있자면 마이클 베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 발생설의 신봉자임이 틀림없다. 그가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스토리를 진행해가는 방식은 멸균 상태의 그릇에서 곰팡이가 피어난다는 이야기만큼이나 황당무계하다. 거기에다 고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트랜스포머의 비밀을 지킨다는 윗윅키단(샤이라 라보프가 연기했던 그 이름 맞다)의 마지막 생존자랍시고 앤소니 홉킨스 같은 대배우가 등장해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이어간다.
시리즈 내내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는 엄청난 피로감을 불러온다. 오토봇과 디셉티콘의 전쟁으로 황폐화된 사이버트론을 되살리기 위한 무언가(큐브, 올스파크, 이번엔 멀린의 지팡이)는 지구에 숨겨져 있다. 그것을 찾아 지구를 침략한 디셉티콘과 이를 저지하려는 오토봇의 격투로 지구의 대도시들이 철거된다. 트랜스포머가 자신들의 행성 외에 알고 있던 행성은 지구뿐인 것일까? 사이버트론의 프라임부터 신이라는 불리는 작자까지 시리즈마다 하나씩 등장하는데, 사이버트론이 멸망한 지 오래라면서 왜 그들은 차례로 일을 벌이는가? 메가트론은 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인가? 지구에 도착한 트랜스포머는 도대체 몇 대인가? 마이클 베이는 이러한 질문을 품는 것이 의문스럽다는 듯 영화의 설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가 쌓은 설정은 다음 영화에서 무너지고, 또 그다음 영화에서 무너진다. <더 록>이나 <나쁜 녀석들>에서 보여준 나름의 재능은 물론, 최근작인 <13시간>에서 보여준 최소한의 재능마저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범블비의 스핀오프를 비롯한 영화의 후속편이 이어진다는 소식은 그저 절망스럽기만 하다. 한 편의 <트랜스포머>를 만들기 위한 돈으로 얼마나 많은 수작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의 촬영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시리즈의 전통과도 다름없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어려운 액션 동선은 물론이고, 단순한 전보 전달을 위한 대화 장면 하나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가령 원형의 로비라는 공간에서, 위층 난간에 서서 아래층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훑는 카메라는 원형의 로비를 화면의 가운데에 세우지 못하고 중심을 잃는다. 진중한 대사를 쏟아내며 폼 잡는 케이드와 옵티머스 프라임마저 쓸데없이 분절된 쇼트로 산만하게 담아내 어지러울 뿐이다. ‘산만함’은 이번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촬영에도 해당하는 키워드이다. 산만한 촬영은 공황장애를 유발할 정도이며,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산만함에 숨이 막히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산만하게 쇼트를 나누고, 쓸데없는 농담과 (자기 딴엔 재치 있다고 느꼈을) 불필요한 음악으로 이어 붙이는 멍청함은 도를 넘어선다. 특히 거슬리는 부분은 화면비이다. 마이클 베이는 화면비에 대한 개념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와이드 비율의 스크린인 일반관에서 영화를 관람했는데, 2.00:1의 비율로 시작한 영화는 2.35:1의 와이드 비율로 계속해서 전환되었다 돌아오길 반복한다. 아이맥스 스크린에서는 1.9:1까지 총 세 개의 화면비가 등장한다. 화면비 전환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는데, 심지어 숏-리버스 숏 대화 씬에서도 화면비가 변화한다. 가령 케이드와 지미(제로드 카마이클)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케이드는 2.35:1의 화면비로, 지미는 2.00:1의 화면비로 담아내는 식이다. 이쯤 되면 아무 카메라와 렌즈로 막 찍은 뒤, 화면비를 크롭 하는 걸 깜빡하고 영화를 편집한 게 아닌가 싶다. 액션 시퀀스에서 화면비 전환은 심각하게 거슬린다. 한 폭발을 두 개의 (아이맥스로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3개의 화면비였을 수도 있다) 화면비로 담아내는 것은 액션의 쾌감을 제거하다 못해 관객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나마 아이맥스처럼 거대한 스크린이었다면 화면비 전환이 조금이라도 덜 거슬렸겠지만, 일반관(CGV 왕십리 8관은 일반관 치고는 크지만 그래도 아이맥스보단 압도적으로 작다)의 작은 스크린에서 이유 없는 화면비 전환을 계속해서 보고 있자면 멀미가 날 지경이다.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영화라는 매체의 질을 낮춰버린다. 우리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기대하는 모든 것의 질을 본질적으로 격하시켜버리며, 영화가 흥행해 이 이상의 시리즈가 계속된다는 것은 서구 문명의 퇴화로도 느껴진다.(진심이다) 영화를 관람했던 상영관에서 비웃음조의 웃음이 아닌 즐거운 느낌의 웃음이 나온 것을 들었을 때 ‘이 영화는 해롭다’는생각뿐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과 홍보에 투입된 3억 달러를 통해 나왔을 수 있는 수많은 가치 있는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영화라는 매체와 산업에 해악이다. 파라마운트가 진심으로 프랜차이즈를 이어갈 생각이라면, 차라리 문을 닫는 게 좋은 판단이고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