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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29. 2017

명확하게 담아내지 못한 감정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신작 <프란츠>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독일에 사는 안나(파울라 비어)에게 프랑스인 아드리앵(피에르 니네이)이 찾아온다. 안나의 약혼자인 프란츠(안톤 폰 루카)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아드리앵은, 안나와 함께 살고 있는 프란츠의 부모님을 찾아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프란츠의 죽음 이우호 마음을 닫고 살아가던 안나는 점점 아드리앵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아드리앵은 안나에게 마지막 고백을 남기고 파리로 돌아간다.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프란츠>는 전쟁 이후의 사람들이 겪는 감정선을 따라간다. 흑백의 영상에 담긴 감정들은 고전적이면서도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절대선과 절대악의 구분이 없었던 1차 세계대전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정당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영화는 그려낸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감정의 근원은 여기서 출발한다. 하지만 꽤 많은 생략으로 영화를 진행시켜가는 프랑수아 오종의 방법은 인물의 감정을 온전하게 전달하기엔 부족하다. 

 <프란츠>의 감정선은 굉장히 점프를 많이 한다. 아드리앵의 고백을 들은뒤 배신감을 느낀 안나는 그를 원망하지만, 어느새 그의 거짓말을 이해한다며 파리까지 찾아가 이야기한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로 감정의 변화를 설명하려 하지만 남용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안나는 아드리앵의 고백을 프란츠의 부모님께 전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만다. 그러면서 안나는 아드리앵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선의의 거짓말을 통해 타인이 안심하고 감정을 되찾으며 삶을 이어나가는 것을 보고 이를 긍정하게 된다. 그것이 아드리앵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쉽게 동의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안나는 아드리앵에게 두 차례 큰 배신감을 느낀다. 독일에서 아드리앵이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한 것과 프랑스에서의 일 두 가지를 겪고 난 후의 감정을 공감할 관객은 많지 않아 보인다. 과거 프란츠의 모습이 그려질 때, 혹은 안나가 프란츠를 회상할 때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화면은 점점 남용되어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진다. 안나의 감정선을 설명할 방법은 외로움뿐이고, 그마저도 영화 안에서 똑바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프란츠>는안나의 감정을 설명할 도구를 하나씩 잃어버린다.

 흑백의 영상은 아름답고 처연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1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어렵게 다가올 배경의 맥락도 없다. 결국 <프란츠>의 패착은 안나의 감정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에 있다. 아드리앵을 이해하기 위해 안나 역시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전쟁 당시의) 적국으로 떠나는 대칭성은 너무 도식적이라 감정선이 끼어들/감정선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서 있는 모습 그 자체로 유약하면서도 솔직한 인간상을 보여준 피에르 니네이와 강인함과 무너짐의 순간을 명확한 연기로 전달한 파울라 비어의 호연이 있었기에, 영화가 명확이 담아내지 못한 감정들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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