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05. 2017

우물 안 개구리지만 발받침은 될 수 있기에

 교외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채드(마이클 패스벤더)는 절도를 통해 생활을 이어간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콜비(브렌단 글리슨)가 이끄는 공동체에서 자란 채드는 이제 가족과 함께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려한다. 그러나 콜비는 채드와 가족이 공동체를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갈등을 빚는다. 생활을 위해 콜비의 지휘 하에 계속 절도를 이어가던 채드는 주지사의 집을 털게 되고, 그로 인해 경찰에게 대대적인 추격을 받게 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작이었던 <캡틴 판타스틱>의 범법자 버전처럼 보이는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은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를 주인공으로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할아버지 콜비는 모든 공동체의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자신의 통제 하에 있기를, 자신의 아들과 손자는 자신처럼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콜비 역시 자신의 아버지 세대부터 이어진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물 속에 완벽히 자리 잡아 나갈 생각이 없는 두꺼비 같은 존재가 콜비다. 아버지인 채드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발목 잡히고 마는, 혹은 무법자 같은 공동체의 생활에 매도되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인물이다. 우물 밖으로 벗어나려는 개구리이지만 벗어나는데 번번이 실패하는, 그렇기에 우물에서 보이는 하늘만 볼 수밖에 없는 존재랄까? 아들인 타이슨(조지 스미스) 역시 우물 안의 개구리이다. 어려서부터, 아니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존재인 타이슨은 학교에 다니긴 하지만, 공동체 밖의 세상엔 익숙하지 않아한다. 차를 몰고, 훔친 개와 함께 놀며 콜비의 엉더리 설교를 좋아한다. 타이슨 역시 우물을 벗어나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타이슨에겐 발판이 있다. 이미 우물에 발목이 붙잡힌 채드는 기꺼이 타이슨을 위한 발판이 되어준다.

 단순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는 그저 평이하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자동차 추격전은 의외로 긴장감 넘치게 촬영되었지만, 그것은 영화의 오락적인 측면을 충족시켜줄 뿐이다. 공동체의 대한 묘사는 스케치 수준으로 단순하게 그려져 대부분의 정황을 추측해야만 하고, 콜비의 괴랄한 설교와 논리는 ‘여기에 왜 설득되지?’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엉터리에 카리스마도 부족하다. 특히 아들의 미래를 위한 격려 아닌 격려를 남기는 채드와 타이슨의 마지막 쇼트는 한국 신파 영화처럼 진부하다. 게다가 채드의 자녀가 타이슨뿐이 아님에도 그의 딸은 오직 병풍처럼 극에 존재하기만 한다. 심지어 타이슨 마저 서사 속에 끼어든다기보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객체로써 다뤄진다. 그나마 자신과 공동체는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는 ‘지구는 펑펑하지’ 메타포는 진부하지만 주제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편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마이클 패스벤더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극 중 빼어난 운전실력으로 도로와 들판을 거침없이 질주하는 채드처럼, 마이클 패스벤더의 연기는 거친 만듦새의 영화를 이끌어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낸다. 콜비를 연기한 브렌단 글리슨이 절대 카리스마가 떨어지는 배우가 아님에도, 이영화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마이클 패스벤더와 한 화면 안에서 비교되기 때문이 아닐까? 약간은 독처럼 작용 하지만, 그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99분의 러닝타임이 꽤나지루하게 느껴졌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상업영화는 영화이기를 포기한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