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l 19. 2017

여성 복수극의 맹점을 고스란히 품은 영화

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 <어미>

 <녹색의자>, <오세암> 등을 연출한 박철수 감독의 어미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관람했다. ‘무서운 여자들: 괴물 혹은 악녀’ 특별전을 통해 상영된 <어미>는페미니즘이 다시 부흥하는 지금 시점에서 다시 돌아볼만한 작품이다. 라디오를 진행하는 홍여사(윤여정)는 딸 나미(전혜성)의 대학입시 뒷바라지에 열을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에서 홍의 차를 기다리던 나미는 인신매매 범에게 납치당하고 강간당한다. 강제로 성매매를 하게 된 나미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지만, 사건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이에 분노한 홍은 인신매매 일당과 나미를 유린한 남자들을 찾아가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여성의 복수를 그린 호러/스릴러 영화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부천에서도 함께 상영된 <캐리>부터 <네 무덤의 침을 뱉어라> 등 남성의 거세 공포를 자극하는 호러영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부터 김옥빈 주연의 <악녀> 등으로 이어지는 액션 스릴러가 그 계보를 이어간다. 남편, 아버지, 남자친구 등의 남성 대리자가 아닌 피해자 본인, 어머니 등이 복수를 행하는 여성 복수극은 물리적인 힘이 떨어진다고 여겨지는 여성이 남성에게 화끈하고 잔혹한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많은 장르영화 팬들의 지지를 받았다. 때문에 여성 복수극을 다룬 영화들은 페미니즘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고, 몇몇 캐릭터는 페미니즘의 상징적인 캐릭터로 자리잡기도 했다. 그러나 여성 복수를 다룬 대다수의 작품들은 끔찍한 결함을 가지고 있고, 박철수 감독의 <어미>도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이 성적으로 폭력/착취를 당하고, 이것이 복수로 이어지는 플롯을 지닌 대부분의 영화는 주인공이 폭력을 당하는 것에 영화 초중반부를 모두 할애한다. 때론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주인공이 물리적/성적 폭력을 당하는 것을 마치 강간 포르노처럼 전시한다. <어미>는이러한 함정에 완벽하게 빠진 영화다.

 나미가 납치되고 난 뒤, 영화는 강간당하는 나미의 모습과 나미를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홍여사의 모습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이를 위해 나미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수 차례 등장하고, 이는 대부분 불필요하게 길고 집요하다. 당연하게도 남성적인 시선으로 담긴 이 장면들은 나미가 당하는 폭력을 전시함으로써 관객의 분노를 이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는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의 연출로 대체 가능하다는 점에서 불필요하고 창작자의 게으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맹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나미의 신체를 훑는 <어미>의 카메라는 강간당하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성폭행을 성애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이러한 장면을 통해 분노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영화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완벽한 모순점으로 다가온다. 탈출 이후 나미의 캐릭터가 (영화 속 맥락이 아니라 캐릭터의 성격과 가치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것은 연출자가 피해자 캐릭터를 다루는데 미숙하고, 고민이 부족했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부족하고 게으른 연출을 메우는 것은 당연하게도 홍여사의 캐릭터와 이를 연기한 윤여정의 힘이다. 대상화되고 무너져내리는 나미의 캐릭터와는 다르게, 영화 전면에 내세운 ‘어미’라는 캐릭터는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홍의 복수극은 전체 러닝타임에 비해 적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강렬하다. 방관자에 가까운 경찰이나 애인인 최교수(신성일)의 도움 없이 나미를 구출하고, 가해자(인신매매 일당, 성구매자 등)를 거침없이 처단하는 모습은 1985년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딸을 혼자 키우는 싱글맘이자, 사별한 이후의 연애 등 본인의 사생활에 있어서도 당당하고 자신의 욕구를 따라가며,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그것이 대입을 준비하는 나미와 충돌하기도 하고, 나미를 구출하는 과정에서도 나미를 ‘자기 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저 헌신적인 어머니 캐릭터로만 그려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간다는 점에서 윤여정의 홍여사는 기억할만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복수의 몇몇 장면들, 가령 홍이 몸을 이용해 성구매자 중 한 명을 꾀어 함께 욕실로 들어가고, 몰래 숨겨온 면도칼로 성기를 잘라버리는 장면 등은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재연에 불과하다. 복수를 행하는 사람이 윤여정의 홍여사라는 점은 매력적으로 다가올지 몰라도, 복수의 행위에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은 또한 연출자의 게으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결국 <어미>는 불필요한 폭력의 전시와 기시감이 드는 복수 장면 때문에 아쉬운 영화지만, 윤여정의 홍여사 캐릭터와 독보적인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점을 그대로 상쇄할 수 있는 장점이 되진 못하지만,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볼 가치는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큐멘터리 장르와 VR의 가능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