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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1. 2017

공간에 삶을 그려내어 흔적을 남긴 여성의 이야기

샐리 호킨스의 화가 모드 루이스 전기영화 <내 사랑>

 개인적으로 어두운 톤의 화면과 새하얗게 밝은 톤의 화면이 연이어 붙은 쇼트로 등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눈 앞에 카메라 플래시를 들이댄 것처럼 눈이 아프다는 것이 그 단순하고 유치하지만 확고한 이유이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지만 종종 몰입을 깰 정도로 거슬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슬링 윌시가 화가 모드 루이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내 사랑>은 이러한 화면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계절이 끝없이 회전하며 등장하고, 어두운 집에서 새하얀 눈이 덮인 겨울로, 새하얗게 밝은 태양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풀과 나무로 옮겨진다. 의외로 <내 사랑>의 이러한 화면 전환은 영화를 보는 내내 거슬리지 않고 넘어간다. 특별히 나의 컨디션이 좋았다거나, <내 사랑>의 화면이 다른 영화들만큼 쨍하지 않아 덜 거슬린 것도 아니다. 극 중 모드(샐리 호킨스)는 여러 계절이 뒤섞여 있는 자신의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본 계절과 풍경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기억되는 것을 그린다”

 <내 사랑>은 집안 곳곳에 그려지고 쌓여가는 모드의 그림처럼 모드 루이스의 생애를 차곡차곡 그려나간다. 계절이 뒤죽박죽인 그림처럼 영화를 이어간다고 시간축을 뒤섞어 가는 묘기를 부리지는 않는다. 대신 단일한 시간축을 우직하게 밀고 가면서도 시간을 점프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볍게 오간다. 모드는 자신의 그림을 별 것 아닌 낙서처럼 취급하고 그를 숨겨야 할 수치로 생각하던 가족을 벗어나, 어떤 방식으로든 자립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과 직업이 필요했다. 그런 순간에 나타난 에버렛(에단 호크)의 가정부 모집 공고를 보고 모드는 관절염으로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먼 길을 걸어간다. 독단적인 에버렛의 집에서 버티기 위해 모드가 선택한 것은 기존 가족의 집에서는 할 수 없었던 그림이다. 에버렛은 어딘가 못마땅해 하지만 결국 집의 벽, 계단, 선반, 창문까지 모드의 그림으로 채워진다. 우연한 계기로 모드의 그림은 뉴욕에 알려지고, 신문과 TV 뉴스에도 소개된다. 모드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동반자가 된 에버렛의 품속에서 숨을 거둔다. 모드 루이스의 이야기는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시놉시스로 소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던 가족에서 벗어나 자신의 공간을 쟁취하고 그 공간에 삶을 그려내어 흔적을 남긴 여성의 이야기이다.

 아이슬링 윌시의 연출은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 모드의 삶과 닮았다. 자칫 에버렛의 비중이 과도해져 최루성 신파 멜로드라마가 될 수도 있었지만, 적정선을 넘지 않는 에버렛의 비중은 <내 사랑>이 오롯이 모드의 이야기임을 알려주고 그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모드의 구원자 따위가 아닌 동반자로서 옆에 존재하는 것 정도이다. 영화 속에서 에버렛이 모드와 한 공간에 함께하지 않는 시퀀스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보면, <내 사랑>이라는 제목보단 <Maudie>라는 원제가 영화를 더 잘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단 호크라는 명배우의 존재감은 적지 않지만, 그의 연기는 존재감을 뽐내며 극의 중심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대신 샐리 호킨스의 연기를 위해 자신의 존재감을 감춘다. 샐리 호킨스의 연기는 <내 사랑>이라는 모드 루이스의 전기영화가 성립하게 되는 필요조건이다. 절룩거리는 걸음걸이, 목이 굳어 고개를 돌리는 대신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 손이 굳어 왼손으로 오른손을 받치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 에버렛의 집에서 페인트를 발견하고 뚜껑에 묻은 페인트를 손가락으로 찍어 벽에 나무를 그리던 모습……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까지 모드 루이스가 된 샐리 호킨스는 모드가 집안 구석구석 그림을 그려 자신의 삶과 시선을 남겼듯, 샐리 호킨스는 영화의 115분 동안 모드 루이스로 존재하면서 그의 흔적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재연한다. 아이슬링 윌시의 우직한 연출이 모드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프레임이 되었다면, 샐리 호킨스는 모드의 시선이 바라본 프레임 속 풍경처럼 모드 루이스를 연기한다.

 <내 사랑>이 모든 것이 좋은 영화는 아니다. 모드가 유명세를 타고난 뒤 에버렛과의 관계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는 후반부는 조금 늘어지고(그제야 에버렛의 존재감이 조금씩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드가 기형아로 태어나 가족들이 죽이 줄 알았던 딸이 건강히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는 에피소드는 갑작스러운 신파극으로 빠지려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모드의 가족이 자신의 후회를 고백하고 “가족 중에 행복한 마지막을 맞는 것은 너 밖에 없다”라는 대사를 건네고, 성인이 된 딸을 찾아간 모드가 그를 그저 바라보다 돌아오는 깔끔한 마무리로 끝났기에 <내 사랑>은 단순한 신파극으로 남지 않았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에버렛이 모드에게 단 한 번의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다.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에버렛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이러한 폭력이 동원되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 전체를 복기해봤을 때 유일하게 튀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세 차례 모드와 에버렛의 발만을 잡는다. 처음 발을 잡는 장면은 모드와 에버렛이 결혼한 후 모드가 에버렛의 발 위에 서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장애를 가진 그는 영화 초반 클럽에서 작게 팔을 흔들 수밖에 없었지만, 둘의 관계가 고용주-고용인의 관계에서 동반자 관계로 변한 시점에서 모드는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장면은 모드가 에버렛과 다툰 후 친한 이웃인 산드라(캐리 매쳇)의 집에 머무를 때이다. 모드를 찾아 산드라의 집으로 온 에버렛은 모드와 함께 집 앞에 있는 그네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모드 대신 에버렛이 그네의자를 앞뒤로 흔들어준다. 나란히 의자에 앉은 둘의 발은 노년의 두 동반자의 모습을 따스하게 그려낸다. 세 번째 장면에선 모드의 발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드 대신 모드의 그림이 에버렛의 발과 함께 잡힌다. 계절을 뒤섞어 생각해내던 모드를 상징하듯 펄럭거리는 달력에서 시작해 에버렛의 발과 그 옆에 놓인 모드의 그림, 집안 곳곳에 그려진 모드의 그림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모드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삶은 집에 녹아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의자에 앉은 에버렛의 발은 홀로 있지만, 모드의 죽음 이후에도 그 집에서 살았고 그 집에서 숨을 거둔 에버렛은 홀로 있지 않게 된다. <내 사랑>은 이렇게 자신이 자신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얻어내고, 그 공간에 녹아들어 흔적을 남긴 모드 루이스의 삶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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