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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Sep 25. 2017

모순을 또 다른 모순으로 덮어 역정 내는 연쇄작용

DMZ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퍼니시먼트 파크>

 1960년대 말~70년대 초의 미국,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미국에선 국내 치안법을 통해 반체제, 반 정권 인사로 분류되는 정치인, 학생운동가, 가수, 노동자 등을 퍼니시먼트 파크라는 캘리포니아의 사막으로 보낸다. 텐트에 마련된 임시 법원은 재판 끝에 감옥으로 직행하는 징역과 퍼니시먼트 파크에서 3~4일 정도를 견디면 석방시켜 준다는 선택권을 끌려온 사람들에게 부여한다. 퍼니시먼트 파크는 출발점에서 성조기가 꽂혀있는 곳까지 85km가량의 사막을 경찰에게 잡히지 않고 횡단해야 하는 미션이다. 국내 치안법은 초헌법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반정부 인사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퍼니시먼트 파크로 보낸다. 이를 위한 재판에선 격렬한 설전이 벌어지지만, 결국 끌려온 민간인들은 모두 퍼니시먼트 파크로 보내진다. 영화는 퍼니시먼트 파크에서 3일을 보내야 하는 637 교화 그룹과 격렬한 설전을 동반한 재판을 받는 638 교화 그룹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은 유럽의 TV 채널들이 퍼니시먼트 파크를 취재하러 왔다는 설정하에 진행된다. 때문에 대부분의 화면은 거친 핸드헬드이고, 재판 장면은 TV 뉴스를 보는 것처럼 건조하며, 인물들을 설명하는 자막 또한 TV 뉴스의 자막처럼 등장한다. 638 교화 그룹의 재판이 진행 중인 임시 법원, 퍼니시먼트 파크의 637 교화 그룹, 637 교화 그룹의 처벌을 시행하는 경찰들, 이렇게세 파트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영화가 진행된다.

 사실 영화의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배틀로얄>의 BR법, <헝거게임>의 살인 시합 등이 떠오르는 <퍼니시먼트 파크>의 국내 치안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적 자본주의 국가를 표현한다.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자 차별, 노동자 혐오, 침략전쟁반대 등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며 자본과 권력을 쥔 기득권층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기득권층의 사람들로 구성된 법원의 인물들은 온갖 변명들을 늘어놓으며 그들을 찍어 누르려한다. 가령 베트남 전쟁에 대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군입대를 거부하는 것은 반역행위”라던가 “혁명을 노래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악영향을 준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교육받을 기회조차 온전히 주어지지 않는 게토의 사람에게 “잘 교육받은 우리 아이들 좀 보세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경우가 또 있을까? 법조인, 정치인, 재벌, 그들의 편에 선 노조대표 등의 인물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단하고 심판한다. 그들의 틀에 맞지 않은, 그 기회조차 온전히 얻지 못하는, 혹은 그 빈약하고 폭력적인 틀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테러리스트로 분류되고,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만든 최상위법인 헌법마저 초월하는 법을 새로이 재정해 그들을 탄압한다.

 이러한 탄압의 장인 퍼니시먼트 파크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굉장히 폭력적이다. 퍼니시먼트 파크의 규칙은 간단하다. 8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조기까지 시간 안에 도착하면 되고, 그룹이 출발하고 2시간 뒤에 출발하는 경찰들에게 체포되지 않으면 된다. 성조기까지 도착한 사람은 징역을 면할 수 있다. 영화는 먼저 출발한 637 교화 그룹과 2시간을 기다리며 부하들에게 제압이 아닌 살상을 위한 총기 사용법을 교육하는 경찰대장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일교차가 섭씨 20도가 넘는 사막의 기온을 끊임없이 내레이션으로 제시하는 것은 퍼니시먼트 파크의 극단적인 상황을 끊임없이 관객에게 일깨워준다. 교화 그룹의 사람들은 규칙의 순응하며 게임에서 이기려 하기도 하고, 경찰을 습격해 무기를 빼앗아 반격을 준비하기도 하며, 그냥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경찰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체포하거나 사살하고, 심지어 성조기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85km를 완주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체포하기까지 한다. 민간인을 지켜야 할 경찰과 군인이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있으며, 이러한 모순의 연쇄가 기득권의 자본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퍼니시먼트 파크>가 담아내는 것은 폭압적인 기득권 권력의 모순이다. 경찰과 군은 그들 스스로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민간인들을 폭력적으로 통제하며 심지어 사살하고, 기득권은 모두에게 평등한 교육과 직업의 기회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모든 법이 부자와 빈자, 인종과 젠더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들이 옳은 방식으로 미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확신은 끝없는 모순의 연쇄를 낳는다. 경찰과 군은 민간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최상위법 위에 또 다른 상위법을 만들며, 그들이 법정에서 내뱉는 말들은 모두 그들의 말로 되받아 쳐진다. 모순을 또 다른 모순으로 덮어 역정 내는 연쇄작용의 끝에서, 결국 창과 방패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밖으로 튀어나와 약자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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