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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Nov 27. 2017

의미가 없기 때문에 무서운 것

조성희의 단편 영화 <남매의 집>

 빈곤해 보이는 어느 반지하방에 어린 남매가 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빨간펜 선생님을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받지 않고, 갑자기 찾아온 누군가는 물 한 잔만 달라면서 거칠게 문을 두들긴다. 남매는 남자의 재촉에 못 이겨 문을 열어주고, 그는 두 명의 괴한과 함께 좁은 집안으로 들어온다. 어딘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괴한들은 새장에 있는 새를 죽이기도 하고, 높으신 분이라면서 벨제붑에게 얘기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따금씩 창문을 통해 섬광이 들어오고 경찰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도시의 빈민가의 반지하방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갑작스러운 침략자들에 의해 불안과 공포로 채워진다.

 <남매의 집>은 이상한 영화다. “남매의 집에 괴한들이 들어온다”라는 시놉시스는 존재하지만 이는 단순히 상황만을 설명할 뿐 43분의 러닝타임을 채우는 이야기는 되지 못한다. 영화의 쇼트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어떤 서사 또는 은유적 이미지로서의 정보가 아닌 미스터리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데, 그 의미 없는 것들이 빈곤한 어린아이들의 반지하방이라는 공간으로 침투해오면서 생기는 불안과 공포가 무슨 방 안에 독가스가 채워지듯 들어온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섬광, 벨제붑이나 빨간펜 선생님처럼 인식할 수 있는 코드들이 등장하지만, 이것들로 어떤 내러티브를 만들어 보려는 관객의 시도는 불안한 영화의 공기 속에서 무용한 시도로 남는다. <남매의 집>은 영화 후반부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의미가 없기에 무서운” 상황과 이미지의 연속이다. 

 조성희의 영화에는 항상 구체적인 시공간이 제시되지 않는다.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배경은 강원도 어딘가 정도로 지칭되며, 70~90년대가 뒤섞여 있는 것만 같은 소품들은 관객이 영화 속 시대를 추측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짐승의 끝>은 아직 보질 못했다) 동시에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곳은 농장과 숨겨진 마을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이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탈출 혹은 외부의 개입이 없는 독립적인 상태를 바란다. 결국 두 영화는 모두 폐쇄된 공간 속에서 버티는 혹은 외부의 침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혹은 공간의) 이야기이다. <남매의 집>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남매가 있는 반지하 방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모를 곳이고 집 밖의 세상은 창 밖이나 문 밖, 심지어 TV를 통해서도 제시되지 않는다. 관객은 남매의 집이 어느 도시에 있는지, 도심인지 교외인지, 빈민가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없다. 집안의 상태를 보고 확신할 수 없는 추측만을 이어갈 뿐이다. <남매의 집>이 조성희의 다른 영화들과 공유하는 것은 이러한 폐쇄성이다. 어떠한 지역성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공간에 대한 설명과 묘사들이 소거된다. 여기서 남는 것은 당장에 카메라로 담긴 공간의 이미지뿐이다. <남매의 집>의 반지하방, <늑대소년>의 농장, <탐정 홍길동>의 숨겨진 마을은 각각 지닌 여러 속성 중 ‘한국의 어느 곳’과 ‘폐쇄된 공간’이라는 것만이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다. <남매의 집>은 언급한 두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시간적 배경에 대한 단서가 제공된다. 순이는 계속 소녀시대의 ‘KissingYou’를 부른다. 영화가 제작된 것이 2009년이니 <남매의 집>의 시간적 배경은 영화가 공개된 시점, ‘Kissing You’가 공개된 시점과 유사한 시간대의 이야기일 것이다. 때문에 <남매의 집>의 반지하방은 <늑대소년>이나 <탐정 홍길동>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한국의 폐쇄적인 어느 곳’인 공간으로 설정된다.

 세 영화는 모두 폐쇄된 공간 속에 외부 인물이 침입하면서 공간 내의 인물들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상황을 그려낸다.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은 각각 자본과 역사라는 구체적인 침입자를 지정하여 이야기를 풀어간다. 반면 <남매의 집>의 침입자들은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조성희의 두 장편영화가 하나의 테마를 잡고 폐쇄된 공간 속으로 몰린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담아낸다면, <남매의 집>은 약자에게 가해지는 불특정하고 의미 없는, 그렇기에 원인도 정체도 알 수 없는 폭력과 공포를 보여준다. 앞서 적었듯, 영화에 등장하는 인식 가능한 코드들은 어떠한 내러티브를 구성하지 못한다. 단지 끝없이 폐쇄된 공간 안으로 스며들어 불안한 공기를 조성하고 영화 속 약자들과 관객을 공포에 떨게 한다. 마치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와 같은 영화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랄까? 철수(박세종)와 순이(이다인) 두 남매는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제한된 정보와 절대 집 밖을 향하지 않는 카메라는 관객의 위치와 남매의 위치를 동일하게 만든다. 애완용 새를 해머로 내리 쳐 죽이고, 자기들 멋대로 순이를 데려가겠다고 하며, 잠시 물 좀 마시고 5분 만에 나가겠다면서 몇십 분을 눌러앉아 있는 괴한들, 해머를 들고 직접적으로 철수를 위협하는 괴한. 순이는 경찰에 전화를 거는 데 성공하지만 수화기는 괴한의 손에 넘어가고, 결국 경찰은 오지 않는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도,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빨간펜 선생님도, 공권력인 경찰도 찾아오지 않는 반지하방 안에서 남매는 공포에 휩싸인다. 

 반지하방은 그 자체로 폐쇄성을 지닌다. 어느 지역의, 동네의, 건물의, 반지하에 있는 그 방은 수많은 겹으로 둘러 쌓여 그 속에 존재하는 약자에게 탈출구를 보여주지 않는 공간이다. TV에서는 알 수 없는 영상과 사운드만이 진동하고 빛은 지상으로 나와있는 방의 절반만큼만 허락되며, 괴한들의 손은 잠시 열린 문틈 사이로 재빠르게 침입한다. 남성으로 구성된 괴한들은 남매를 물리적 폭력으로, 성적으로, 존댓말로 가려진 폭력적인 언행으로 위협한다.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파국을 맞이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화의 상황에서 철수는 끝없이 풀던 문제집의 답을 지우고 다시 푼다. 순이는 한복을 입은 김에 절을 하고 싶다고 말하며 방 안을 돌아다닌다. 폐쇄된 공간 안에 갇힌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의미 없는 일의 반복이 유희이고 세뱃돈도 아닌 세배하는 것이 소망이 되는 공간. 사회의, 남성의, 폭력의 손길은 약자를 좁고 폐쇄된 틀 안으로 밀어 넣고 마지막 남은 희미한 행위까지 앗아간다. 처음 문을 두들긴 괴한(구교환)은 방을 떠나기 직전에야 자신이 요구했던 물을 마신다. 절반 가까이 물을 흘리면서 벌컥 들이킨 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처음 약속한 5분 만에 집을 떠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와 다른 두 괴한은 그냥 반지하방에 침입한 뒤 그냥 나간다. 기어이 반지하방까지 침투해오는 손길에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그저 침략한다.

 영화는 파국의 원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버블경제가 무너졌을 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오일쇼크가 왔을 때, 국가가 어떤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사회 구성원이라 불리는 한 개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파국이 무엇인지 정확이 인지하기 힘들다. <남매의 집>에서 제시되는 무작위하고 불안하기만 한 정보들처럼 분명 어떤 파국이 다가오고 벌어지고 있음에도 한 개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조성희가 이 영화를 통해 제시하고 있는 파국은 이러한 양상이다. 파국은 일어난다. 파국 속의 개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파국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에 파국을 해쳐나갈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이렇게 파국은 불안의 공기로써 개개인에게 스며든다. 불안한 공기는 가장 낮은 곳을, 가장 지하에 있는 곳을 향한다. 폐쇄된 공간으로 내몰린 약자들은 불안과 공포의 첫, 그리고 최악의 희생자가 된다. <남매의 집>은 조성희의 영화 속에서 반복되고 변주되는 파국의 양상을 잡아낸다.


 그리고 아직도 <남매의 집>이 무슨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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