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팡> 왕빙 2017
처음으로 관람한 왕빙의 작품이다. 영화는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살아온 팡슈잉의 임종 직전 며칠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죽어가는 팡슈잉의 멈춰있는 눈과 입을 담고 풀샷으로 방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담는다. 카메라와 팡슈잉의 눈은 서로를 응시하다가도 가족에게로 방 밖으로 (팡슈잉은 TV를 응시하기도 한다) 눈을 돌린다. 여기서 가시화되는 것은 사람의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은 사람을 둘러싼 사소하면서 거대한 관계들이다. 번갈아 가며 병간호를 하고 거의 모든 가족이 모여 임종을 지키며 종종 낚시를 하러 나가는 가족이라는 집합과 관계들. 팡슈잉의 죽음이라는 이슈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로 확장되고, 그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자식 된 도리라던가 장례절차 등을 이야기하는 가족들의 관계망 자체만이 점점 가시화된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생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카메라와 같은 매체는 죽음을 제대로 가시화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카메라가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에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 혹은 죽음 근처에 널려있는 관계 등을 조망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시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인 요양원에서 종종 보게 되는 죽음과 치매라는 질병, 침대나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노인과 그들을 보러 집과 요양원을 오가는 가족들의 대비가 <미세스 팡>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활력과 비활력적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생과 사의 경계는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지는 관계를 통해 기록되는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미세스 팡>이 가시화한 것은 더 이상 관계할 수 없는 망자와 그를 둘러싼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활력을 가진 관계망의 강렬한 대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