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등교,첫 출근, 첫 휴가, 첫 사랑…. 처음이라는 것에 큰 의미부여를 하진 많지만 자꾸만 ‘처음이 뭐였지?’, ‘처음이 어땠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인생에서 여러 번 처음이란 것을 겪게 되기에 시간이 지난 처음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갔던 유치원, 처음으로 갔던 놀이동산 등의 기억은 남아있더라도 잔상처럼 뇌를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가장 좋아하는 것의 처음은 어떻게 기억날까? 처음으로 봤던 영화가 뭔지,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떠올려봤다.
내기억 속 처음으로 본 영화는 <쥬라기 공원>이다. 4살인가 5살 때 처음 본 기억이 난다. 그 또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유치원에서 공룡과 관련된 책들을 공룡의 이름들을 막 외우기 시작했을 때이다. 지금이야 티라노사우르스, 스테고사우르스 같은 공룡계의 메이저 밖에안 떠오르지만, 당시에는 알고 있는 공룡의 이름만으로 5X5 빙고를채울 수 있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이 방구석에 앉아서 공룡 이름들을 스케치북에 적고 있는 것을 본부모님이(그러니까 내 기억은 아니고 내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 <쥬라기 공원>의 비디오를 빌려다 준 것은 당연한 일이아닐까?
당시우리 집 TV는 안테나가 달려있고 다이얼로 채널을 돌리는 과하게 아날로그적인 TV였다. 아마 화면 크기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보고 있는 모니터보다작았을 것이다. 그런 TV를 가족 넷이 함께 쓰는 방구석에놓고 비디오데크에 재생과 되감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쥬라기 공원>을 봤다. 부모님 이야기로는 같은 영화를 3번 연달아서 본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없는 기억이다. 큰 스크린으로 봤어야 하는 영화지만, 4:3 비율의 작은 화면으로본 <쥬라기 공원>은 ‘동물의 왕국’을 보는 듯했던 것 같다.
그렇게본 <쥬라기 공원>에 대한 기억은 사실 없는 거나마찬가지다. 2015년에 <쥬라기 월드>를 보고 나서 다시 보기 전까진 영화의 줄거리도 잊고 있었다. 솔직히말해서 영화를 봤다는 사실 말고는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 1995년생인 내가 5살이었던 것이 1999년이고, 각각 1993년과 1997년에 나온 1편과 2편을 연달아 봤다는 것 정도만 기억에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라서 가능했을 지도 모르지만) 4시간이 넘도록 TV앞에서 영화를 돌려봤었고, 티라노사우르스와 벨로시렙터 등이 등장한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익룡을 본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3편은 아예 패스했나 보다. 영화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음에도 <쥬라기 공원>의 잔상은 기억 속 여기 저기에 남아있다. <쥬라기 공원>을 접한 지 15년이 지나 등장한 속편 <쥬라기 월드>가 원작에 바치는 오마주들을 자연스럽게 캐치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쥬라기공원>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확신이 든다.
<쥬라기공원>처럼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잔상처럼 남아있는 영화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가금씩 시간이 날 때마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에봤던 영화들을 다시금 찾아보게 된다. <쥬라기 공원>뿐만아니라 <크리스마스 악몽>, <쥬만지>, <혹성탈출>(2001), 같은 영화들도 자꾸만찾아보게 된다. 제프 골드브럼(당시엔 주인공이 제프 골드브럼인지도몰랐다)이 타고 있는 자동차 위로 등장하는 티라노사우르스의 머리, 기다랗고마른 잭 스켈링턴이 할로윈 마을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던 장면, 로빈 윌리엄스가 늪처럼 변한 거실 바닥으로빨려 들어가던 모습, 말을 타고 인간들을 사냥하던 유인원들 등등 여러 영화의 장면들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그 때 보던 영화들을 다시 보면 머릿속을 떠돌던 잔상들이 짜맞춰진다.
추억의영화들을 자꾸 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영화를 제대로 봤다고,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할 순 없어도 영화의 이미지들은 잔상이 되어 기억에 남는다. 머릿속을자유롭게 부유하던 이미지들이 영화를 재관람하면서 맞춰지는 순간의 느낌은 오랜 시간이 쌓여야만 알 수 있는 감정이다. 처음으로 봤던 영화의, 그 영화를 보던 시절에 봤던 다른 영화들의리메이크와 뒤늦은 시퀄 소식들이 들려온다. 처음 접했던 영화의 흐릿한 기억은 새로운 영화의 기대감으로변해간다. 그 영화들은 원작의 잔상을 어떻게 짜맞춰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