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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Feb 21. 2018

한국영화의 쉼터가 될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2018

 사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는 날씨이지만, 작물을 길러야 하는 농촌에서는 아직 유효한 개념이다. 겨울엔 작물을 심을 봄을 준비하고, 봄엔 겨울까지를 보낼 농사를 시작하며, 여름엔 계속하여 논과 밭을 관리하고, 가을엔 겨울나기를 준비하며 추수하고 겨울나기를 위한 음식들을 준비한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리틀 포레스트>는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고시, 알바, 연애, 서울생활 등에 지친 혜원(김태리)이 시골의 고향집으로 돌아와 1년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하시모토 아이 주연의 일본 영화와는 다르게 사계절을 한 작품 안에 담았다는 게 차이점이다. 배경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겨온 만큼, 영화의 배경과 서사, 디테일이 얼마나 잘 옮겨졌는지가 이번 영화의 관건이다. 다행히도 배경은 안정적이고, 서사는 더욱 밀도 높아졌으며, 디테일은 (사계절을 한 영화에 담는다는 러닝타임의 한계가 존재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일본의 영화(원작은 읽지 않았음)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나아간 지점은 혜원과 엄마(문소리)의 관계이다. 영화를 전개하는 혜원의 내레이션 사이사이 엄마의 내레이션이 끼어든다거나, 요리를 하는 혜원의 뒤에 슬그머니 엄마가 나타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던가, 플래시백 장면에서 엄마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고등학생 혜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은 모녀관계를 더욱 밀도 있게 그려낸다. 또한 극 이전에 사망한 혜원의 아빠는 혜원의 엄마가 자신의 뜻대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시발점이 될 뿐 서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온전히 혜원의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혜원과 엄마라는 모녀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각자가 답을 찾아 집을 떠나는 것도, 집으로 돌아와 답을 찾는 혹은 그 가능성을 보이는 것은 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감자빵 레시피를 주고받으며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가부장제/브로맨스 서사로 점철된 최근의 한국 상업영화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선함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리틀 포레스트> 이식 또한 만족스럽다. 주인공이 농사를 짓고,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과정과 카메라의 구도는 유사하다. 하지만 떡볶이나 막걸리 등의 음식들이 등장하고, 누가 봐도 한국의 농촌이라 느껴지는 배경들이 펼쳐진다. 일본 영화에 비해 혜원과 친구들 간의 관계가 밀접한 것도 한국 <리틀 포레스트>만의 특성이다. 다만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 혜원의 삼각구도가 미묘한 러브라인의 휩싸이는 몇몇 장면은 조금 과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세 배우의 연기는 한국 농촌에서의 <리틀 포레스트>가 가능하게 한 가장 큰 매력이다. 주연을 맡은 김태리는 <리틀 포레스트>를 온전히 자신의 영화로 가져간다. 혜원은 배우 김태리 본인의 성격을 포함해 <문영>의 문영, <아가씨>의 숙희, <1987>의 연희가 모두 섞여 만들어진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혜원의 얼굴에서 김태리와 그가 앞서 연기했던 모든 배역들의 얼굴을 엿볼 수 있다. 김태리의 팬들에게 <리틀 포레스트>는 최고의 팬서비스이자 김태리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지 않을까? 고등학생 김태리, 대학생 김태리, 고시생 김태리, 알바하는 김태리, 요리하는 김태리, 먹방 찍는 김태리, 농사짓는 김태리를 한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장르를 굳이 만들어보자면 김태리 블록버스터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류준열은 <소셜포비아>의 BJ양게 이후 가장 본인에게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다. <더킹>이나 <택시운전사> 등의 작품에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과는 다른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진기주는 이번 영화의 발견이다. 이번 영화가 데뷔작인 그는 능청스럽게 은숙이라는 역할을 소화해낸다. 은숙과 혜원이 함께 있는 장면들을 보면 촬영 현장의 즐거움이 스크린을 뚫고 관객에게까지 전달된다.

 무엇보다 엄마 역할로 등장한 문소리는 <리틀 포레스트>의 가장 큰 동력이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엄마의 내레이션과 플래시백 속 혜원과의 대화는 영화가 주제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방지하며 집중도를 높여준다. 김태리의 장편영화 세 편을 모두 함께한 문소리는 이번 영화에서 드디어 김태리와 한 프레임 속에 함께 등장한다. 무엇보다 김태리와 문소리의 투샷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리틀 포레스트>를 봐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피와 폭력, 남성성으로 가득한 액션, 가부장과 브로맨스에 기반을 둔 최근 한국 상업영화들의 경향 속에서 <리틀 포레스트>는 신선한 쉼터가 되어준다. 그것만으로도 오랜만에 돌아온 임순례 감독의 신작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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