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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Mar 05. 2018

붕괴와 복구를 반복하는 위력의 사랑

<팬텀 스레드> 폴 토마스 앤더슨 2017

*스포일러 포함 


 상류층 사교계의 드레스를 디자인하는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게 된 웨이트리스 알마(빅키 크리엡스)에게 한눈에 반한다. 레이놀즈는 알마를 데려와 자신의 작업실에서 일을 시키고, 그를 자신의 뮤즈이자 연인으로 삼는다. 알마는 편집증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민함에 휩싸여있는 레이놀즈를 상대하며 지쳐간다. 그러던 중 알마는 레이놀즈가 마시는 찻주전자에 그가 죽지 않을 정도로 독버섯을 탄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신작이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은퇴작인 <팬텀 스레드>는 익숙한 뮤즈-피그말리온 서사로 시작하여 사도-마조히즘적인 멜로드라마로 마무리된다. <매그놀리아>,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 등의 영화를 통해 신경질적인 인간군상과 그들의 인생을 그려온 폴 토마스 앤더슨의 스타일이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팬텀 스레드>의 서사가 전형적인 피그말리온 서사에서 알마가 주도하는 사도-마조히즘 서사로 변형되는 과정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드레스 디자이너인 레이놀즈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여러 젊은 여성을 돌아가며 자신의 연인 겸 뮤즈로 삼아온다. 그는 신이 아니기에 인간을 조각할 수 없고, 때문에 그의 취향에 맞는 몸매를 지닌 여성의 몸에 자신의 드레스를 입히면서 자신만의 조각상을 완성한다. 알마 또한 그러한 과정에 속한 한 여성에 불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마는 행동한다. 레이놀즈에게 맞춰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의 세계 안에 균열을 낸다. 영화의 주도권이 레이놀즈에서 알마로 넘어가게 되는 장면은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서프라이즈 저녁식사를 준비해주는 장면이다. 알마는 집 겸 작업실의 모든 직원과 레이놀즈의 누나인 시릴(레슬리 맨빌)까지 밖으로 나가 달라고 부탁한다. 레이놀즈가 집으로 돌아오자 알마는 자신이 직접 지은 드레스를 입고 계단 아래로 내려온다. 계단 위에 서서 레이놀즈를 내려다보는 알마의 시선은 레이놀즈의 규칙이 지배하는 그의 세계가 붕괴되고 주도권이 알마에게 넘어갔음을 알리는 신호이다. 자신의 취향대로 조리되지 않은 아스파라거스를 한 입 베어 물고 불평하는 레이놀즈와 그에 맞서서 왜 한 번도 자신에게 맞춰주지 않냐고 되묻는 알마의 말싸움은 결국 알마가 레이놀즈에게 독버섯을 먹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통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레이놀즈는, 자신이 위대하기에 뮤즈가 있는 것이 아니라 뮤즈/연인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강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알마는 그가 다시 자신이 강해졌음을 깨달을 때 그에게 다시 독버섯을 먹인다. 레이놀즈는 그것이 독버섯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알마는 레이놀즈의 세계를 붕괴시키고, 레이놀즈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사랑을 이룬다. 

 엔드크레딧이 시작될 때의 장면, 레이놀즈와 알마는 함께 드레스를 만들고 있다. 파괴와 복구를 번갈아 가며 완성되는 사랑은 기괴하리만치 감탄스럽다. 바스트 숏 보다 더욱 깊게 들어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집요한 클로즈업 숏들과 문구멍으로 알마를 관음 하는 레이놀즈와 직접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침투하여 레이놀즈를 쟁취하는 알마의 대비, 레이놀즈의 규칙에 의해 계단을 오르던 알마가 계단 위에서 레이놀즈를 내려다보던 모습 등은 <팬텀 스레드>의 강렬한 서사를 지탱한다. 특히 피그말리온에서 사도-마조히즘 서사로 변형되는 영화를 가능케 한 비키 크리엡스의 놀라운 연기는 영화의 동력이나 다름없다. 은퇴를 앞둔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관록에 맞서며, 또는 조화를 이루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공력은 위력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후반부에 펼쳐지는 상상인지 실제일지 모를 레이놀즈와 알마의 다정한 모습들이 실제라고 믿을 수 있는 것 또한 두 배우의 힘이기에 성립되는 장면이 아닐까? 또한 영화 내내 배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한, 그러면서 영화의 정점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서사의 강력한 변곡점을 다지는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영화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알마가 두 번째로 레이놀즈에게 독버섯을 먹이는 장면에서 피아노 선율 하나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음악은 놀랍기만 하다. 이 모든 것이 합해진 <팬텀 스레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역량이 다시 한번 그 진가를 발휘한 작품이다. 아직 그의 필모그래피를 절반밖에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질 만큼 <팬텀 스레드>는 위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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