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pr 03. 2018

밤새 즐거이 마신 칵테일처럼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유아사 마사아키 2017

 검은 머리 아가씨(하나자와 카나)가 교토의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는 선배의 결혼식 뒤풀이 이후 우연히 들린 칵테일 바에서 변태 아저씨 도도(야마지 카즈히로)와 히구치(나카이 카즈야), 하누키(카이다 료코)를 만난다. 아가씨는 히구치, 하누키와 함께 교토 밤거리의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헌책 시장, 학교 축제 등을 거치며 길고 즐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같은 결혼식 뒤풀이 장소에 있던 안경선배(호시노 겐)는 첫눈에 반한 검은 머리 아가씨를 찾아 교토의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마인드게임> 등을 연출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신작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교토의 밤거리를 배경으로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사건들을 담아낸다. 그의 전작인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와 세계관을 공유(원작이 되는 모리리 토미히코의 소설 또한 몇몇 캐릭터를 공유한다)하고 있기도 하다.  

 유아사 마사아키는 검은 머리 아가씨를 바늘 삼아, 술과 책과 감기 같은 소재를 실 삼아 복잡한 교토의 밤거리를 하나로 엮으려고 시도한다. 이는 극 중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운명이나 인연 따위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술기운에, 책을 찾기 위해 검은 머리 아가씨는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니고, 그것을 매개로 자신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연결한다. 끝없는 술잔, 술병의 행렬과 영화 밖 현실 속 책의 작가들을 끌고 오는 헌책 시장의 신(요시노 히로유키)의 이야기와 책의 끝이 이어지는 이미지는 각 캐릭터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그것에 사용되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관객의 눈 앞에 제시한다. 각 캐릭터마다 다르게 그려지는 상대적인 시간성 또한 직접적인 이미지로서 관객의 눈 앞에 제시된다. 천천히 흘러가는 검은 머리 아가씨의 시계, 조금은 빠르게 흘러가는 히구치와 하누키의 시계, 아주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회갑잔치 사람들의 시계, 무한하게 지체되는 시간 속에서 사는 것처럼 멈춰 있는 이백(무기히토)의 시계. 얼핏 추상적으로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설명하려는 수많은 대사의 범람 속에서도 이미지를 통해 서사를 조립해 나가는 유아사 마사아키의 능력은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 이어 다시 한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안경선배와 관련된 이야기는 지루하기만 하다. 검은 머리 아가씨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안경선배는 93분의 러닝타임 내내 후발주자로서 검은 머리 아가씨가 지나친 곳들을 찾는다. 그는 일방적인 사랑을 이루어내기 위해 하룻밤 동안 총력을 다하며, 집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아가씨의 관심을 욕망한다. 물론 영화는 인연, 운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일명 최눈알 작전을 언급하며 인연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즉 안경선배가 검은 머리 아가씨를 끝임 없이 따라다니며 얼굴을 비춘 것이 곳 인연을 만들어 내었다는 이야기로 서사가 귀결되고 만다. 때문에 기나긴 밤을 지나고 검은 머리 아가씨와 직접적인 만남을 앞둔 안경선배의 머릿속이 그려지는 장면은 그 장면 자체가 주는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지겹게만 느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유아사 마사아키 특유의 다채로운 작화와 이미지를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학교 축제나 지역 축제 등의 행사, 또는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맛있는 술로 밤을 지새우며 밤거리를 돌아다녀본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형형색색의 맛있는 칵테일을 밤새 들이키며 밤을 새웠던 몇몇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마치 맛있는 술과 함께하는 친구와의 술자리를 함께 즐긴 것과 유사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안경선배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지겨워지고 지루해지는 이야기는 (아마 원작에서부터 정해진 운명처럼) 영화의 후반부를 쳐지게 만든다. 그만큼의 아쉬움을 제하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충분히 맛있는 칵테일처럼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멈추지 않는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