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원과 엄태화 감독의 만남 <가려진 시간>
최근 한국영화 중 판타지 멜로는 <늑대소년>과 <뷰티 인사이드> 두 작품 정도였다. 두 작품 모두 흥미로운 설정, 관객들을 휘어잡는 비주얼과 연기로 인기를 모았었다. 다만 두 작품은 스토리텔링 부분에서 관객 모두의 호감을 사진 못했다.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은 흥미로운 설정과 비주얼, 배우들의 호연을 모두 챙기고 만족스러운 스토리까지 선보인다.
어린 성민(이효제)가 시간이 멈춘 곳에 들어가게 되는 초반부는 <구니스>나 <E.T> 같은 스필버그 스타일의 한국버전처럼 보인다.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산 속을 헤집고 다니다 판타지적 사건을 마주한다. 이후 <아이들…>이나 <극비수사>같은 전형적인 한국 수사극의 전개로 접어든다. 어른 성민(강동원)이 등장하고 나서는 스릴러의 분위기가 접목된 멜로드라마 같아진다. 그러면서 극 중간에 삽입된 ‘가려진 시간’ 장면은 온전한 판타지 세계다.
적어놓고 보니 완전 장르 짬뽕 영화 같다. 엄태화 감독은 성민과 수린(신은수)의 로맨스를 관객에게 납득시키고 효과적으로 몰입을 돕기 위해 여러 장르에서 클리셰를 빌려온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클리셰들은 스토리를 전달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로맨스영화 중에서도 긴 편인 130분이라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 간 데는 장르적 장치들의 힘이 크다. 또한 전체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취한 것이 이야기를 깔끔하게 만들어 줬다
초현실적인 설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연출의 힘도 컸지만, 배우들의 외모와 연기의 힘 역시 컸다. 특히 강동원의 외모는 판타지에 최적화 되어있다. 강동원은 도술을 부려도, 엑소시즘 의식을 치러도 일말의 어색함 없이 판타지를 소화하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엄태화 감독은 강동원에게 외모를 마음껏 사용할 것을 주문했(을 것일 테)고, 강동원은 이를 온전히 소화해낸다. 어린 성민으로 나온 이효제는 판타지의 초석으로써의 역할을 깔끔하게 소화해낸다.
수린 역의 신은수는 이번 영화가 연기 데뷔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연기를 선보인다. . 영화 전체가 수린의 긴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진 액자 구성이고, 수린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신은수의 역할이 중효한 영화였다. 그는 건조한 톤으로 대사를 내뱉다가도 이효제/강동원과 함께하는 장면에선 다양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올해 <곡성>의 김환희부터 <아가씨>의 조은형, <부산행>의 김수안, <우리들>의 최수인 등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아역배우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신은수도 그 대열을 잇는 멋진 배우이다.
여러 조연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를 열고 닫는 역할의 문소리는 든든한 주춧돌이 되어 준다.민성의 친구로 등장하는 두 아역배우 김단율과 정우진은 영화 초반의 스필버그스러움을 만들어주는데 큰 공을 세운다. 수린의 새아빠로 등장하는 김희원의 항상 짜증나있는 연기는 수린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형사반장 권해효는 영화 중후반부를 지탱하는 대들보이다. 잠시 등장하는 엄태구는 ‘가려진 시간’ 속에서의 삶이 실제라면 어떤 모습일지 생생히 전달한다.
<가려진 시간>은 ‘판타지’ 멜로를 표방하고 있기에 비주얼이 중요한 영화이다. 특히 시간이 멈춘 ‘가려진 시간’에서의 비주얼은 굉장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물건과 완전히 멈춰선 거리 등을 만들어낸 특수효과와 배우들(엑스트라들이 직접 멈춰서 있었다고 GV 때 감독이 언급했다)의 노력이 돋보인다. 노력에 걸맞은 결과물은 아름다운 비주얼을 접하고 싶은 관객들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준다. 또한 수린과 성민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숲 속의 아지트는 <경성학교>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장르상업영화 속 공간이었다.
<가려진 시간>은 130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영화다. <잉투기>로 가능성을 보여준 엄태화 감독의 성공적인 상업영화 데뷔이다. 최종 스코어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신비한 동물사전>과 같은 날 개봉으로 날짜를 옮긴 자신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상업영화, 장르영화가 그렇듯 호불호가 갈리긴 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이런 판타지는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