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5박 17일의 일정으로 유럽을 다녀왔다. 런던-파리-베니스-로마를 여행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처음으로 서구권 국가에 간다는 생각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런던과 파리에서는 제대로 '덕질'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닥터 후>, <셜록> 등의 작품이 탄생한 런던과 영화의 탄생을 알린 도시 파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굉장히 떨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이 글은 본인이 직접 런던과 파리를 여행하면서 들른 두 도시의 시네마테크 및 일반 극장과 블루레이 샵 등 영화 관련 공간의 대한 경험을 적어 볼 생각이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 히스로 공항에서 영국박물관(구 대영박물관) 인근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이동했다. 짐을 풀고 17시간의 비행(경유 포함)의 피로를 샤워로 씻은 다음 영국박물관을 간단히 둘러보았다. 그러고 남은 시간엔 숙소에서 걸어서 얼마 걸리지 않는 블루레이 샵이 있다는 구글맵의 검색 결과를 따라 길을 나섰다. 목표는 FOPP라는 블루레이 샵이었다. hmv를 먼저 들르려 했지만, 걸어서 30분가량 걸리는 옥스퍼드 스퀘어에 위치해 있어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러나 FOPP에 도착하기 전 눈길을 끄는 곳이 있어 먼저 방문했다. 포비든 플래닛이라는 영화/게임/애니메이션 관련 굿즈와 서적을 파는 영국의 프랜차이즈이다. 런던에 위치한 덕후들의 성지로 불리는 이 곳은 프레드 M. 윌콕스의 컬트 SF 영화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 1956)에서 이름을 따왔다. 상점 밖에 전시된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2018)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2018) 굿즈들에 시선을 빼앗겨 포비든 플래닛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입장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피규어들을 통해 바로 포비든 플래닛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개봉한 두 편의 <스타워즈> 영화 때문인지, 아니면 영국의 수만은 스타워즈 덕후들 덕분인지(실제로 런던의 많은 여행지에서 스타워즈 관련 티셔츠나 굿즈를 구경할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캐릭터의 피규어가 전시되어 있었다. 옆에는 조금 더 다양한 영화들의 피규어들이 있었다. <고스트 버스터즈>(1984)의 네 주인공부터 <저지 드레드>(1995), 미국 드라마 <한니발>(2013~2015), <나이트메어>(1984)의 프레디 크루거, <터미네이터 제네시스>(2015) 버전의 로봇, <크리스마스 악몽>(1993)의 잭 스켈레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2003~2017)의 잭 스패로우, 코믹스 버전의 <엑스맨> 등의 피규어가 있었다. 한화로 몇십만 원에 해당하는 가격인 데다가 안전하게 가져올 방법도 없어서 구매하진 못했지만, 다양한 피규어들을 구경한다는 것 자체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많은 피규어들을 한 장소에서 구경한 것은 몇 년 전 도쿄 여행을 가서 아키하바라에 들렀을 때 이후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았다. 전 세계 덕후들을 휘어잡는 국가답게 전 세계적인 히트 상품들이 즐비했다. 가장 대표적인 영국산 작품인 <닥터 후>의 달렉 피규어가 있었다. 사진은 없지만 옆에는 역대 닥터와 컴패니언들의 랜덤 피규어가 담긴 상품, 타디스 모양의 민트 캔디 통, 소닉 스크루 드라이버 레플리카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가운데 사진은 타디스 모양을 본뜬 주전자이다. 영국에는 이런 괴랄한 상품 또한 즐비하다. 포비든 킹덤은 정식으로 발매된 상품만 판매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가짓수가 많진 않았지만, 글 뒷부분에 등장할 캠든 타운 마켓이나 아마존/이베이 등의 온라인 오픈마켓 등을 보면 다양한 장르와 작품이 온갖 물건들과 뒤섞인 혼종으로 가득하다. 닥터 후 옆에는 <해리포터>에 등장한 소품들의 레플리카가 전시되어 있었다. <불의 잔>(2005)에 등장한 트리위저드 컵과 인어의 알, <아즈카반의 죄수>(2004)에 등장하는 헤르미온느의 타임 터너, <혼혈왕자>(2009)에 등장하는 로켓, 덤블도어와 도비의 피규어 등이 전시 및 판매되고 있었다. 사진엔 없지만 <혼혈왕자>에 등장한 사랑의 묘약, 여러 캐릭터들의 지팡이, 각 기숙사별 목도리와 와펜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 그 밖의 <반지의 제왕>(2001~2003), <스타워즈>, 마블 코믹스와 시네마틱 유니버스, DC 코믹스 등의 메이저한 작품들의 굿즈들도 대거 볼 수 있었다. 피규어부터 시작해 티셔츠와 모자를 비롯한 의류, 캔디나 초콜릿 등의 먹을거리, 포스터나 엽서, 다양한 어린이용 장난감 등을 볼 수 있었다. 판매하는 굿즈의 규모와 다양한 장르의 가짓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매니악한 상품들도 많았다. 샘 레이미의 걸작 호러영화 <이블 데드> 시리즈의 후속 드라마인 <애쉬 vs 이블 데드>(2015~2018)에 등장한 퍼펫과 애쉬의 피규어, 각종 데다이트의 피규어 등이 판매 중이었다. 그 밖에 <13일의 금요일>(1980)의 제이슨 부하스, <할로윈>(1978)의 마이클 마이어스 등 수많은 호러 아이콘들의 피규어와 가면들이 있었다. 여기에 <나루토>나 <원피스>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는 물론, <레프트 4 데드>의 좀비들이나 <젤다의 전설>, <기어스 오브 워>, <어쎄신 크리드> 등 게임 관련 피규어들도 가득했다. 심지어 <프레디의 피자가게>(Five Nights at Freddy's)와 같은 인디 게임의 피규어까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릭 앤 모티>(2013~) 시즌3에 등장하는 '피클맨 릭'의 포스터였다. 최근 가장 즐기면서 본 작품이기에 눈에 띈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릭 앤 모티> 관련 굿즈들이 매장 안에 가득했다. 피규어나 포스터, 엽서 등은 물론 각종 모자와 티셔츠들이 가득했다.
포비든 플래닛(내가 들른 곳은 런던 메가스토어이다)은 총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있는 1층에는 앞서 설명한 온갖 피규어와 굿즈들로 즐비하고, 지하층에는 각종 아트북, 코믹스, DVD, 블루레이 등을 판매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은 <블랙팬서>(2018)나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 등의 아트북은 물론, 온갖 영화와 드라마, 게임 등의 아트북이 가득했다. 가장 압권인 것은 게임 <젤다의 전설>의 아트북이었는데, 다른 아트북들에 비해 훨씬 거대한 사이즈는 물론, 경전을 연상시키는 표지 디자인과 방대한 분향의 스크린샷, 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다양한 코믹스들과 게임 및 영화를 원작으로 한 소설(혹은 영화의 원작 소설)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최근 코믹스 원작 영화들이 흥행하면서 국내에도 여러 코믹스들이 정발 되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이 곳의 방대함은 따라잡지 못한다. 마블이나 DC, 그 밖의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코믹스들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최근 개봉한 <블랙 팬서>나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와 연계되는 이슈들까지 놓여 있었다. 주로 단행본 위주로 판매되는 한국에 비해 얇은 분량의 이슈들이 서가의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표지가 렌티큘러로 제작된 <엑스맨> 이슈나, 가수 위켄드(Weeknd)와 마블 코믹스의 콜라보로 제작된 이슈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최신의 이슈를 구하려면 직구가 필수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프림로즈 힐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캠든 타운에 볼거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20분 정도 걸어가니 토요일을 맞이한 사람들이 캠든 타운 마켓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기타를 메고 메탈을 연주하는 버스커부터 즉석 생과일주스와 런던 기념품을 함께 판매하는 부스까지 다양한 사람과 상점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중 마켓 초입에 위치한 옷가게가 눈길을 끌었다. 티셔츠부터 원피스나 구제 자켓 등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그곳이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아래 사진들과 같은 옷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데드풀>(2016)과 <닥터 후> 타디스의 콜라보 티셔츠,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2008~2013)의 월터 화이트가 <왕좌의 게임>의 철왕좌에 앉아 있는 포스터, 갖가지 종류의 <스타워즈> 패러디 포스터까지 수많은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티셔츠가 즐비했다. 물론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이 진행된 상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동대문이나 동묘에서 파는 다소 허접한 티셔츠들에 비하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옷들이었다. 특히나 데드풀과 타디스, 빅벤 앞에 서있는 다스 베이더와 스톰트루퍼 등의 디자인은 참으로 런던스러운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 사정과 가방의 여유 공간이 넉넉하다면 자신의 최애 작품 혹은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한두 벌 정도 사 오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앞서 적은 것처럼 <해리포터>와 <닥터 후> 관련 상품은 런던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다. 캠든 타운 마켓 역시 마친가지다. 해그리드가 <라이온 킹>(1994)에 등장하는 포즈로 어린 해리 포터를 들고 있는 티셔츠는 여러모로 재치 있는 디자인이 아닌가 싶다. 런던 트램에 탑승하려는 두 달렉을 경관들이 저지하고 있는 엽서는 <닥터 후>의 팬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은 귀여움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다 들른 기념품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엽서지만 공식 굿즈만큼 탐나던 제품이다. 영국산 작품이 아님에도 런던에서 <스타워즈>의 인기는 대단하다. 포비든 플래닛 같은 공식 굿즈샵이나 캠든 타운 마켓의 수많은 비공식 패러디 상품 속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는 장르가 <스타워즈>이기도 하다. 사진의 <해리포터> 티셔츠와 같은 구도로 다스 베이더가 카일로 렌을 들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겨운 (그러나 실제 하지 못한) 한 때를 그린 티셔츠도 있었다.
런던에 와서 킹스 크로스 역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해리포터> 팬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정과 예산 문제로 런던 교외에 위치한 '해리포터 스튜디오' 방문은 포기했지만, <해리포터> 덕분에 유명해진 공간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마침 숙소에서 캠든 타운으로 향하는 길목에 킹스 크로스 역이 있어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다.
킹스 크로스 역 대합실에 가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을 통해 처음 모습을 보여준 9와 4분의 3 승강장 포토존이 있다. 실제로 영화를 촬영한 곳은 실재하는 플랫폼의 어느 기둥이겠지만, 그곳은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을 위한 공간이기에 따로 포토존을 만들어 두었다. 사진에는 주변에 사람 없이 텅 비어 보이지만, 사실은 사진을 찍기 위해 20~40여 분 정도 줄을 서야 한다. 바로 옆에 있는 해리포터 샵의 직원이 사진을 찍어주고, 그 사진은 마치 놀이공원 롤러코스터에서 찍힌 사진처럼 돈을 내고 즉석에서 받을 수 있다. 물론 사진을 찍을 때 개인 사진기나 핸드폰 등으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해리포터 샵에서는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스티커나 엽서, 핀뱃지, 목도리나 가운 등의 의류, 지팡이 레플리카 등등 종류도 다양하다. 호그와트 입학 허가서, <아즈카반의 죄수>에 등장한 호그와트 비밀지도 등의 흥미로운 제품들도 가득하다.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로 기억하는 작품이 <마법사의 돌>인데, 여유만 된다면 다시 런던을 찾아 각종 굿즈들을 쓸어가고 싶다.
<해리포터> 굿즈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공간이 킹스 크로스 역이나 해리포터 스튜디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J.K. 롤링이 직접 집필한 연극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가 상연 중인 팰리스 시어터 인근에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House of Minalima)가 있다. 이 곳은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의 그래픽 디자인을 맡은 미라포리아 미나(Miraphora Mina)와 에두아르도 리마(Eduardo Lima)가 함께 세운 공간이다. 미나리마라는 이름의 프로덕션 회사를 함께 설립한 둘은 <해리포터> 세계관에 대한 그들의 작업물을 전시하고 굿즈를 판매하기 위한 갤러리 겸 상점을 만들기 위해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를 열었다고 한다. 지상층에서는 해리 포터나 시리우스 블랙의 현상수배 포스터를 렌티큘러로 제작한 엽서, (여기에도 역시나 있는) 지팡이 레플리카, 여러 버전의 <해리포터> 원작과 <신비한 동물 사전>(2016)의 각본집 등이 판매 중이다. 올해 가을 개봉 예정인 <신비한 동물 사전: 그린델왈드의 범죄>(2018)의 각본을 예약판매 중이기도 했다.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의 1, 2, 3층(영국은 우리나라가 1층이라 부르는 층을 지상층으로 부른다)은 미나와 리마의 <해리포터> 관련 작업물을 전시해 둔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해리포터> 세계관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건물 인테리어와 함께 <마법사의 돌>에 나왔던 호그와트 입학 허가서가 바닥 곧곧에 뿌려져 있고, 벽은 예언자 일보와 여러 캐릭터들의 현상수배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다. 전시품으로는 영화에 등장했던 여러 책들의 표지 디자인(특히 케네스 브레너가 연기한 질데로이 록허트의 저서들이 눈에 띈다), 예언자 일보, 호그와트 비밀지도(고가에 판매 중이기도 하다), 조지와 프레드 위즐리 형제의 장난감 가게 홍보물, 호그와트의 네 기숙사 문양이 사용된 여러 디자인, 미국 마법 의회 MACUSA에서 사용된 각종 디자인 등이 전시 중이다. 만약 런던에서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연극을 관람할 예정이라면, 팔레스 시어터 바로 인근에 있는 하우스 오브 미나리마를 꼭 방문하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