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15박 17일의 일정으로 유럽을 다녀왔다. 런던-파리-베니스-로마를 여행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처음으로 서구권 국가에 간다는 생각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런던과 파리에서는 제대로 '덕질'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닥터 후>, <셜록> 등의 작품이 탄생한 런던과 영화의 탄생을 알린 도시 파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굉장히 떨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이 글은 본인이 직접 런던과 파리를 여행하면서 들른 두 도시의 시네마테크 및 일반 극장과 블루레이 샵 등 영화 관련 공간의 대한 경험을 적어 볼 생각이다.
런던에서 처음 찾은 극장은 워털루 역 인근에 위치한 BFI IMAX이다. 웨털루 역에서 지하보도, 템즈강변에서 육교를 이용하여 방문할 수 있다. 원래 BFI 사우스뱅크를 먼저 방문하여 영화를 관람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비어 BFI IMAX에서도 영화를 관람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IMAX를 CGV에서 독점으로 서비스하고 있지만, 영국의 경우 다양한 업체가 IMAX 본사와 계약을 맺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멀티플렉스인 Odeon, Cineworld, 과학박물관 등에서도 IMAX를 만나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BFI IMAX는 멀티플렉스 극장에 붙어있는 방식이 아닌 로터리 한가운데에 놓인 단관 극장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상영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원통형 유리 건물의 모습에 살짝 놀라게 된다. 런던 내 가장 큰 스크린의 IMAX관이기에 건물의 위용부터 달랐던 것 같다. 참고로 BFI IMAX의 스크린 크기는 26mX20m로 국내와 비교하면 CGV 천호 IMAX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이다. 건물에 들어서려면 BFI 사우스뱅크나 워털루역 방면과 연결된 지하보도로 이동해야 한다. 건물 입구 옆에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바가 위치해 있다. 영화를 보기 전 간단한 식사나 커피, 맥주 등을 즐길 수 있다. BFI 사우스뱅크도 그렇고, 런던에 많은 극장에는 극장 안에 바가 함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에서는 CGV 용산 아이파크몰 정도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점심시간이나 퇴근시간 즈음 런던 거리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맥주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극장 로비에 바가 있는 것 또한 영국인들의 맥주사랑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극장을 방문했을 때 상영작은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2018) 단 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가 개봉한 지 한 달 좀 안 되는 시간이 흐른 시점이라 한 편만 상영 중이었던 것 같다. 이미 한국에서 CGV 왕십리 IMAX로 관람한 영화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해외의 IMAX도 경험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표를 구매했다. 티켓은 국내 멀티플렉스들처럼 영수증이었다. (사진 속 다른 티켓은 먼저 발권한 BFI 사우스뱅크의 티켓이다) 가격은 학생요금(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만 25세까지 학생요금이 인정된다)으로 구매하여 15.50파운드, 성인의 경우 19.50파운드였다. 3D이기에 2파운드가 추가된 가격이다. BFI의 이름을 붙인 극장이지만, 극장 운영 자체는 영국 내 멀티플렉스 프랜차이즈인 Odeon이 맡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BFI 홈페이지에서 예매 페이지로 넘어가면 Odeon의 홈페이지로 연결되고, 극장에 있는 무인판매기 역시 Odeon 프랜차이즈의 것이었다. 런던에서 시간이 남았다면 Odeon의 다른 지점도 들렀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상영시간이 되면 로비 한쪽에 위치한 계단을 통해 검표 후 상영관으로 입장할 수 있다. 상영관 입구 앞에는 팝콘과 음료 등의 간식거리를 판매하는 매점과 화장실, 앉아서 대기할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공간 한쪽의 흰 벽에서는 곧 개봉할 IMAX 상영작 <앤트맨과 와스프>(2018)의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다.
좌석은 국내 IMAX 상영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좌석 단차는 CGV 천호나 CGV 용산 아이파크몰의 IMAX관과 유사하다. 앞뒤 간격이나 의자의 편안함 등도 비슷하다. 상영관 입구에서 나눠준 3D 안경은 포장되어 있었고 퇴장할 때 다시 반납한다. 영화 상영 전에는 상영작의 포스터와 스틸컷이 상영되며 영화의 OST가 흘러나온다. 스크린 밑과 뒤에 조명이 달려 있어, 스크린 뒤에 있는 스피커 등의 설비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곳도 역시나 상영시간에 딱 맞춰 영화를 상영하지는 않는다. 한국처럼 광고시간이 있는데, 10분 정도인 국내보다 긴 20여분에 달하는 시간을 광고에 할애한다. 하지만 광고의 대부분이 지루한 CF들이라면, 이곳에서는 여러 영화들의 예고편을 상영해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IMAX로 개봉 예정인 제이슨 스테덤 주연의 <메갈로돈>(Meg, 2018), 국내에서도 곧 개봉 예정인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2018) 등의 예고편을 볼 수 있었다. 영화 자체의 상영도 만족스러웠다. 국내 상영관과 비교한다면 CGV 천호 IMAX 정도의 느낌이었다. 스크린 크기나 사운드 출력 등 많은 부분에서 두 상영관이 유사했다. 필름 IMAX를 지원하는 상영관이지만, 이 영화는 필름으로 제작된 영화가 아니기에 일반 IMAX 상영으로 관람했다.(레이저 IMAX 상영은 지원하지 않는다) 여기에 국내에서는 편집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의 두 장면을 해외에서의 관람을 통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BFI IMAX에서 지하보도로 이동하면 BFI 사우스뱅크가 나온다. BFI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한국영상자료원 같은 기관이다. 시네마테크를 설립해 각종 고전영화, 예술영화 등을 상영하는 기획전을 진행하고, 영국의 여러 영화/영상자료를 수집 및 복원해 소장하는 아카이브의 역할을 한다. 영국의 영화와 TV 드라마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블루레이나 DVD로 출시하기도 한다. 국내의 시네마테크를 다니면서 유럽의 시네마테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직접 방문하고 영화를 관람할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BFI 사우스뱅크에 도착하니 익숙한 로고가 눈에 띄었다. BFI가 제작하거나 제작지원을 한 영화들에는 BFI의 로고가 삽입되는데, 건물 입구에 붙은 저 로고와 동일한 것이다. 밑에는 7월에 진행될 배우 겸 감독 아이다 루피노 회고전을 알리는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극장에 들어서 먼저 챙긴 것은 이번 달의 프로그램이 담긴 프로그램 팸플릿이었다. 팜플릿이라기엔 두께나 구성이 웬만한 영화제 프로그램 북 뺨치는 수준이다. 상영작과 상영예정작에 대한 정보와 짤막한 리뷰가 들어 있고, 한 달 분량의 상영 캘린더 또한 수록되어 있다. 내가 방문했던 날(6월 14일)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애니메이션 <브래드위너>(2017), 현재 진행 중인 아녜스 바르다 기획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신작 <자마>(2017) 등이 상영 중이었다.
6월 내내 아녜스 바르다 기획전이 진행 중이었기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비 한쪽에 있는 샵에서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8) 속 아녜스 바르다의 모습을 본떠 만든 입간판이 놓여 있었고, BFI를 비롯해 영국에서 출시된 아녜스 바르다의 블루레이와 DVD를 판매하고 있었다. 영국은 의외로 블루레이가 비싸지도 않고, 이런저런 할인을 많이 하는 곳이라 방문한 김에 (게다가 여성영화제에서 바르다의 작품을 보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았기에) 아녜스 바르다의 블루레이를 몇 장 구매하고 싶었지만, 검색 결과 대부분 지역코드B 고정인 제품들이라 다음 기회에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BFI 사우스뱅크 샵 안 쪽으로 들어가니 더욱 많은 블루레이와 DVD가 판매 중이었다. BFI에서 출시된 작품들은 물론, 영국 내에서 출시된 다양한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지역코드B 고정이라 구매하지는 못했다. BFI에서 출시되는 블루레이(주로 영국 내 작춤과 유럽 작품)의 양에 놀라기도 했고, 시네마테크 안에 웬만한 블루레이 샵에 버금가는 물량과 종류의 제품들이 있다는 점에도 놀랐다. 영어로 된 영미권 작품들은 장르별로, 그 밖의 작품들은 국가별로 정리되어 있다. 코드B나 코드프리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있다면, 런던을 여행할 때 이 곳에서 다양한 블루레이를 구매하고 영화도 관람하는 것 또란 재밌는 경험일 것 같다.
BFI 사우스뱅크 샵에서는 블루레이와 DVD 외에도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한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블루레이 매대 옆에 있던 티셔츠들이다. 벨라 타르, 브라이언 드 팔마, 베르너 헤어조크 등 여러 거장들의 이름이 마치 헤비메탈 밴드의 티셔츠 같은 디자인으로 적혀있다. 감독의 팬이라면 한 장 정도는 사고 싶은 센스 있는 디자인이다. 옆에는 각종 영화의 OST 음반을 판매하고 있었다. CD뿐만 아니라 LP로 발매된 음반이 대부분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1985), 오슨 웰즈의 <악의 손길>(1958) 등의 LP가 눈에 띈다. 게다가 올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 <빌어먹을 세상 따위>(2018)의 LP 또한 있는 것 역시 흥미로웠다. 드라마 OST가 LP로 발매되는 곳이라니, 영국은 역시 덕질 하기엔 최적의 공간이다. 어느 샵을 가도 있는 엽서는 이 곳에도 있었다. 오른쪽 사진 아랫줄에 위치한 엽서들은 여러 영화를 10년 단위로 묶은 세트이다. 옆 매대에는 더욱 다양한 종류의 영화 엽서들이 있었다. 사진 위 쪽의 두 줄은 영화 스티커이다. 맨 윗 줄에는 영화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 가령 셜록 홈즈나 제인 오스틴 등의 스티커가 있고, 그 아랫줄에는 미국 드라마 <스타트랙>의 캐릭터 스티커들이 있다. 미국 드라마의 캐릭터 스티커가 영국이 있다는 것도 약간 신기한데, 출시된 스티커의 종류도 많아 새삼 놀라기도 했다.
BFI 사우스뱅크 샵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의 포스터, 혹은 영화와 관련된 포스터를 경매를 통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베이처럼 실시간으로 경매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고, 6월 28일에 있을 경매에 대한 홍보였다. 사진에 올라온 포스터는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1977)의 흥행 이후 1978년에 진행된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 콘서트 포스터이다. 악기를 들고 있는 C-3PO와 R2-D2의 모습이 귀엽다. 예상 견적이 5000~10000파운드(한화 약 740만 원~1500만 원)이라니, 영국의 <스타워즈> 팬덤도 미국 못지않은 것 같다. 경매를 진행하는 회사의 사이트(propstore.com/auction)에 들어가 보니 사진의 포스터 외에도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1957),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 등의 포스터가 함께 경매에 올랐다고 한다. 경매는 같은 날 방문했던 BFI 관에서 열렸다. 해당 사이트에는 포스터 외에도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용된 소품의 경매를 진행 중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홈페이지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이것과는 별개로 영화의 포스터를 파는 곳을 유럽 여행 중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로마에는 오래된 영화들의 포스터를 새로이 출력해서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국내에서는 영화 포스터들이 주로 IMAX 등 특별관 관람 증정품이나 이벤트 경품으로 많이 소비되는데, 유럽처럼 정식으로 포스터를 판매하는 곳이 많이 생겼다면 좋겠다.
BFI 사우스뱅크 로비에도 BFI IMAX와 유사하게 바와 카페테리아가 있어 간단하게 맥주와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미디어테크이다. 로비 박스오피스 옆에 위치한 미디어테크에서는 다양한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영국과 할리우드의 다양한 TV 방영물, 몇 편의 영화(내가 방문했을 땐 중화권 영화 몇 편이 서비스 중이었다)와 영화 클립 및 예고편을 볼 수 있다. 영화를 기다리면서 몇 편의 영상물을 봤는데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물론 유튜브를 뒤져보면 어느 정도 영상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렇게 공공기관에서 아카이빙을 하여 서비스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본 <퀴어라마>(2017)라는 작품은 BFI 아카이브에 있는 영화 및 TV 방영물속 퀴어니스한 장면들을 모아 만든 작품이었다. 이러한 아카이빙과 서비스를 통해 시작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참고로 BFI 미디어테크에서 볼 수 있는 영상들은 BFI Player라는 이름으로 온라인 서비스 중이기도 하다. BFI 사우스뱅크에 영화 및 미학 서적들을 열람할 수 있는 라이브러리도 있지만 아쉽게도 방문해보지는 못했다.
BFI 사우스뱅크에서 관람한 작품은 게오르그 빌헬름 파브스트의 1929년작 무성영화 <판도라의 상자>이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여러 판본이 생겼지만, 이번 상영에 쓰인 판본은 2009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2K로 복원한 135분짜리 판본으로 상영했다. 네거티브 필름이 유실되었기에 남아있는 여러 판본을 조각조각 합쳐 복원했기에 화질이 조금은 들쑥날쑥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복원이었다. 이번 상영은 BFI 전속 피아니스트인 스티븐 혼의 연주로 진행됐다. 피아니스트이지만 플루트, 아코디언, 종 등 다양한 악기를 번갈아 가며 연주하여 풍부한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자이다. 스티븐 혼은 얼마 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있었던 에른스트 루비치의 <인형>(1919) 상영 때도 연주를 했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런던 BFI 사우스뱅크에서 그의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영화는 무용수를 꿈꾸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루루(루이즈 브룩스)가 친구의 아버지이자 공연 기획자인 루드윅(프리츠 코트너)과 사랑에 빠졌다가 파멸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8개의 챕터로 나누어 담은 작품이었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기에 여성혐오적인 부분이 있지만, 루이즈 브룩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와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미묘한 레즈비언 묘사, 유려한 촬영 등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무성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덕분에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다른 극장도 가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많았지만 일정 상 경험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