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극장
얼마 전 15박 17일의 일정으로 유럽을 다녀왔다. 런던-파리-베니스-로마를 여행하는 짧은 일정이었지만, 처음으로 서구권 국가에 간다는 생각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런던과 파리에서는 제대로 '덕질'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닥터 후>, <셜록> 등의 작품이 탄생한 런던과 영화의 탄생을 알린 도시 파리를 방문한다는 것은 굉장히 떨리고 설레는 일이었다. 이 글은 본인이 직접 런던과 파리를 여행하면서 들른 두 도시의 시네마테크 및 일반 극장과 블루레이 샵 등 영화 관련 공간의 대한 경험을 적어 볼 생각이다.
영화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그랑 카페라는 이름과 1895년 12월 28일이라는 날짜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최초의 영화 중 한 편으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상영된 공간이다. 물론 <열차의 도착>(1895)이 완전히 최초의 영화인 것만은 아니지만, 관객에게 돈을 받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상영한 첫 순간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순간이다. 우리가 지금 흔히 알고 있는 '영화관에서의 영화 상영'이라는 형태가 최초로 탄생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열차의 도착> 이전에 토마스 에디슨이 만든 영화 등이 있었지만, 그랑 카페에서의 상영과는 다르게 작은 기계에 동전을 넣고 혼자 영화를 관람하는 형태였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있다. 같은 해 3월 뤼미에르 형제의 또 다른 영화인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이 지인들을 초청한 상영회에서 상영되었기에 영화의 탄생을 1895년 3월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관객들이 5프랑이라는 가격을 지불하고 영화를 관람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실 뤼미에르가 <열차의 도착> 등 몇 편의 단편영화를 상영했던 그랑 카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랑 카페가 있던 자리는 지금 Scribe이라는 이름의 호텔로 바뀌어 있다. 그 자리에는 이 곳에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공간이었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서 있을 뿐이다. 파리 오페라 극장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파리 지하철 오페라 역에서 내리면 금방 찾아올 수 있다. 호텔이 들어선 대신, 호텔 1층에 위치한 '뤼미에르 레스토랑(Restaurant Le Lumiere)'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통해 뤼미에르 형제의 업적을 기억할 수 있다. 그랑 카페는 자리를 옮겨 호텔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비록 <열차의 도착>이 상영된 그 공간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이름과 역사를 지닌 공간이기에 이 곳에서 커피와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파리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공간 1순위에 올라와 있는 곳은 당연하게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파리에 위치한 시네마테크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영화가 아카이빙 되어 있으며, 수천 가지의 영화 관련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공간이다. 물론 BFI나 한국영상자료원처럼 여러 기획전을 통해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여러 영화를 발굴 및 복원하는 작업 역시 진행 중인 곳이다. 1936년에 개관되어 프랑수아 트뤼포나 장 뤽 고다르와 같은 누벨바그의 기수들부터 현재의 감독들까지 수많은 프랑스의 영화인들이 영화를 감상하고 공부하던 공간이다. 이 곳을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파리 여행의 목적을 달성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1936년에 설립된 공간이라 낡고 오래된 건물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공원 한 구석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모습은 깔끔하고, 청명한 날씨에 썩 어울리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정문에 붙은 고양이 형상의 마스코트(역시 모든 시네필은 고양이를 좋아한다)에 붙은 말풍선에는 현재 진행 중인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들을 만나보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정문 옆에는 작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프랑수아 트뤼포의 데뷔작이자 누벨바그의 시작을 알린 작품인 <400번의 구타>(1959)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이었다. 이 곳에서 가볍게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기다려도 되고, 영화를 보고 나와 이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이어진 테러의 여파인지, 간단한 짐 검사(파리 대부분의 공공시설에서 짐 검사를 해야 했다)를 하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입장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찾아 처음 들른 곳은 2층에 위치한 Bookshop이었다. 이름은 Bookshop이지만 서적 외에도 DVD와 블루레이, 영화와 관련된 엽사나 핀뱃지 등의 굿즈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같이 영화 동아리를 하고 있는 친구가 이 곳에서 엽서를 몇 장 사다 준 적이 있는데, 실제로 방문하여 엽서들을 살펴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현재 기획전이 진행 중인 브라이언 드 팔마와 크리스 마르케와 관련된 상품들이 따로 진열되어 있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시스터스>(1972), <캐리>(1976) 드으이 블루레이와 DVD 등이 눈에 띄는 와중에 다양한 도서가 있었다. 한 명의 감독을 두고 이렇게 많은 종류의 도서가 쓰이고 출간된다는 점이 새삼 부러웠다. 크리스 마르케의 작품은 아직 제대로 접하지 못했다. 크리스 마르케는 아직 블루레이로 출시된 작품이 없기에 DVD들만 진열되어 있었는데, 돈과 가방의 여유 공간만 있었다면 그의 대표작을 모은 박스셋을 구매하고 싶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겠다.
이 곳 또한 BFI 사우스뱅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블루레이와 DVD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영화의 제목 알파벳 순서대로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의 숫자와 다양성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물론 국내에 출시되어 있는 블루레이와 DVD도 적지 않은 양이지만, 유럽에서 만나게 되는 제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저 부럽기만 하다. 물론 프랑스의 경우 영국만큼 가격이 낮지는 않다. 게다가 영어자막이 없는 경우도 많아 한국의 관객들에겐 접근성이 떨어진다. 지역코드 또한 접근성을 낮추는 문제 중 하나이다. 한국의 관객들에겐 아쉽겠지만, 현지의 관객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환경이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유럽권의 작품뿐만 아니라 박찬욱, 차이밍량 등 아시아권 감독들의 영화도 여럿 발매되어 있고, 오즈 야스지로 등 흔히 정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거장들의 작품은 큼직한 박스셋으로 출시되어 있다. 이러한 박스셋에 수록된 작품들만 공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는 영화박물관이 있다. 영화가 탄생한 곳인 만큼, 영화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 또한 이 곳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도 영화박물관이 있지만, 이 곳의 소장품들은 그것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 해진다. 가령 프리츠 랑의 전설적인 SF영화 <메트로폴리스>(1927)에 등장한 로못 마리아,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에 등장했던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의 해골, 찰리 채플린의 걸작 <모던 타임스>(1936)에 등장한 톱니바퀴들의 미니어처와 컨셉아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소장품들은 각 영화의 클립과 함께 전시되는데, 영화에 나온 소품들을 영화 장면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떤 특권처럼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영화 속 소품 외에도 초기 영화에 쓰이던 카메라와 영사기는 물론, 초기 영화관의 홍보 현수막과 포스터 등 또한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위층에서는 <디아볼릭>(1955) 등의 영화로 유명한 앙리 조르주 클로조에 대한 전시가 진행 중이었고, 다른 층에서는 현재 기획전이 진행 중인 크리스 마르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관람한 작품은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 브라이언 드 팔마 외에도 누벨바그의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인 크리스 마르케, <시계태엽오렌지>(1971)로 유명한 배우 말콤 맥도웰,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의 초청된 얀 곤잘레스 감독의 <Knife+Heart>(2018)의 개봉 전 프리미어 상영 등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된 작품들을 관람하기엔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고, 영어로 된 작품들을 보기에도 처음 보는 작품을 영자막도 없이 보기엔 부담이 가서 <캐리>를 선택하게 되었다. 블루레이를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품이고 내용도 이미 다 꿰고 있기에 편안하게 감상했다. 극장에서 <캐리>를 감상하는 것은 처음이라 더욱 즐거운 경험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상영관에는 영화인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캐리>를 본 상영관은 마릴린 관이었다. 스크린의 크기는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 1관과 유사하다. 스크린뿐만 아니라 사운드 등의 퀄리티도 유사했다. 다만 좌석이 좀 더 편안하고 앞 뒤 간격이 조금 더 넓다. 좌석은 지정된 것이 아닌 선착순인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뿐만이 아니라 여행 중 방문한 파리의 모든 극장이 선착순 좌석제였다. 시네필이라면 누구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방문해보고 싶어 할 텐데, 첫 파리 방문에 그 소망을 이루어서 행복한 시간이었다.
파리의 행정구역은 루브르 박물관이 위치한 1구를 중심으로 삼은 달팽이 모양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중 퐁피두 센터 인근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지나 센 강을 건너 5구로 넘어오면 여러 예술극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이 등장한다. 3개의 영화관이 줄지어 있는 이 골목에서는 극장의 입장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각 영화관에서 상영화는 영화들의 리스트는 전 세계 어느 시네마테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골목 입구에 위치한 극장인 Le Champo에서는 (방문 당시에는 아직 진행 전이었단) 쿠엔틴 타란티노 기획전을 알리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펄프 픽션>(1994)부터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까지 6편의 작품을 하루 종일 상영하는 기획이었다. Le Champo의 홈페이지(http://www.cinema-lechampo.com)를 살펴보니 1938년에 세워진 극장이었다. 운영 중 화재로 한 번 소실되긴 했지만, 상영관 2개의 규모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운영 중인 유서 깊은 극장이다. 1989년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극장의 홀을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중 한 명인 자크 타티에게 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르네 클레르, 루이 말, 클로드 샤브롤,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 등의 거장들이 즐겨 찾은 극장으로도 유명하다. Le Champo에서 조금 더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Reflet Médicis 극장이 있다. 이 곳은 1964년 상영관 3개의 규모로 개관한 극장으로, 골목의 다른 극장들에 비해 비교적 최신의 작품들을 상영한다. 1994년 프랑스의 영화 배급사인 BAC의 제안으로 Les Ecrans de Paris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4개 극장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Les Ecrans de Paris는 '모두를 위한 영화를 배급한다'는 취지 하에 운영되고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국내에선 영화제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왕빙의 <미세스 팡>(2017), 사무엘 마오즈의 <폭스트롯>(2017) 등이 상영 중이었다. 물론 최신작 외에도 기획전의 형식으로 여러 고전 영화들을 상영하기도 한다. 현재는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감독인 이탈리아 지알로 호러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 다섯 편을 상영 중이기도 하다. 방문했을 당시 홍보물을 통해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관람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Reflet Médicis를 비롯한 Les Ecrans de Paris 극장들의 소식은 홈페이지(http://www.lesecransdeparis.fr)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곳을 찾은 목적은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La Filmothèque du Quartier Latin를 방문하기 위함이다. 파리에 거주하던 친구가 이 곳에서 사용이 가능한 쿠폰을 넘겨주어 이 곳에서 적어도 한 편의 영화를 보려고 계획했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였던 장 막스 쿠세(Jean-Max Causse)가 2006년 이 자리에 있던 라틴 쿼터 영화관(Quartier Latin)을 사들여 현재의 예술영화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앞선 두 극장에 비해 역사가 오래된 공간은 아니지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관객들을 만족시켜주는 공간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장 뤽 고다르 기획전에 일환으로 <네 멋대로 해라>(1960)와 <경멸>(1963) 등의 영화, 할리우드 배우인 캐리 그랜트와 오드리 헵번의 기획전을 통해 빌리 와일더의 <사브리나>(1954)와 스탠리 도넌의 <샤레이드>(1963) 등의 영화, 에른스트 루비치의 기획전으로 <사느냐 죽느냐>(1942) 등의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이들 기획전은 현재도 상영 중이며, 기획전과는 별개로 조너선 뎀의 <양들의 침묵>(1991),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콘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1997) 등의 상영 중이었다. 상영작에 관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www.lafilmotheque.fr)에서 확인할 수 있다.
La Filmothèque du Quartier Latin에서 관람한 작품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거장 더글라스 서크의 1956년작 <바람에 쓴 편지>이다. 친구가 넘겨준 쿠폰을 통해 무료로 관람했지만, 원래 티켓 가격은 4유로이다. 상영 시작 20분 전부터 티켓을 판매하며, 로비가 좁기 때문에 극장 문 밖에서 줄을 서서 입장한다. 한국의 영수증 티켓과는 달라 좋았는데,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한 장면이 프린트되어 있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더운 날씨에 20여분 간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지만, 우연히 만난 한국인 관객과 잠시 대화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흘렀다. 관객의 대부분이 노년의 분들이었는데, 얼마 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관람한 마리아 알바레즈의 <씨네필>(2017)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씨네필>은 매일같이 극장을 찾는 아르헨티나의 은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지팡이를 집거나 워커를 끌고 극장을 찾는 모습이 이 날 극장 앞에서 본 노년층 관객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씨네필>에서는 시네마테크 문화가 오래되었기에 젊은 관객이 적고 노년층 관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런던 BFI 사우스뱅크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방문했을 때도, 그리고 이 곳을 방문했을 때도 그러한 지점들이 느껴져 신기했다. 한국의 경우 영상자료원에서 보게 되는 얼굴의 절반 이상이 20~40대의 젊은 관객들이기 때문이다.
La Filmothèque du Quartier Latin는 2개의 상영관을 가지고 있다. 각각 마릴린과 오드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바람에 쓴 편지>가 상영되는 곳은 마릴린관이었다. 프랑스의 극장들은 런던에서 경험한 극장이나 국내의 극장과는 조금 다른 구조를 보여준다. 가장 큰 차이점은 화장실 혹은 화장실로 향하는 통로가 상영관 내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제외한 파리의 극장들은 모두 이런 방식이었다. 특히나 이 곳의 화장실 입구는 스크린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행히도 영화 상영 중에 화장실을 오가는 사람이 없어 관람에 큰 방해가 되진 않았지만,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곳 또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마찬가지로 지정좌석제가 아닌 선착순 좌석제였다. 좌석에 가방을 두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가방이 옆 옆 자리로 옮겨져 있는 다소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스크린의 크키가 크진 않았지만, 작고 아늑한 분위기의 상영관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쉬웠던 점은 마스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스코프 비율의 화면에서 2.00:1 비율의 영화를 상영하니 스크린에 빈 공간이 많았다. 극장에서 더글라스 서크의 영화를 보는 것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1955) 이후 처음이었다. 강렬한 원색의 색감은 아름다우면서도 곧 붕괴될 인물 간의 관계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내고, 이를 한치에 빈틈없이 완벽하게 담아내는 카메라에 놀라움을 느꼈다. 영어자막도 없이 관람했지만 크게 어려운 대사들이 나오진 않아 무난하게 관람했다.
한국엔 CGV와 롯데시네마, 영국에 Odeon 등의 극장 프랜차이즈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mk2나 UGC가 대표적인 극장 프랜차이즈이다. 이번 여행 중에는 mk2를 두 차례 방문했다. mk2는 극장 외에도 배급 또한 하고 있는 기업이다. 국내 영화제나 시네마테크를 자주 다니는 사람이라면, 작품 앞에 등장하는 mk2의 로고를 몇 번 정도는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5구의 극장들을 살펴보고 정해진 곳 없이 길을 걷다 mk2 Odeon (côté Saint Michel)을 발견했다. 영국의 프랜차이즈인 Odeon과는 관계없는 곳으로, Odeon은 지명일 뿐이다. 재밌게도 mk2 Odeon를 검색하면 두 곳의 극장이 나온다. 세인트 미첼 방면(côté Saint Michel)이라고 쓰인 극장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는 대형 멀티플렉스 프랜차이즈처럼 느껴지지만, 상영작을 보면 그 생각이 바뀐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해피아워>(2015)와 데이빗 린치의 데뷔작인 <이레이저 헤드>(1977) 등의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317분의 달하는 방대한 러닝타임을 지닌 <해피아워>가 멀티플렉스 프랜차이즈에서 상영된다는 점이 놀라웠는데, 상영시간이 긴 만큼 총 3개의 타임으로 쪼개서 상영 중이었다. 혹시 다른 영화들은 어떤 것이 상영 중일까 궁금하여 검색을 해보았더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1988), 자크 타티의 <축제일>(1949) 등의 파리 곳곳의 mk2 상영관에서 상영 중이었다. 국내에서는 시네마테크의 기획전이나 몇몇 멀티플렉스에서 적당히 열고 마는 특별전에서야 겨우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 일상적으로 상영 중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mk2 Odeon (côté Saint Michel)에서 <해피아워>를 보고 싶었지만, 한 번에 다섯 시간이 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일정상 무리였고, 불어자막으로 이를 보는 것은 더더욱 무리이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걸어가니 UGC Odeon과 mk2 Odeon (côté Saint Michel) 극장이 연이어 등장했다. 두 극장 중 mk2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 곳을 찾은 이유는 <헤드윅>(2001)의 감독 겸 주연이었던 존 카메론 밋첼의 신작인 <How to talk to Girls at Parties>가 개봉했기 때문이다. (UGC에서는 상영하지 않았다) 엘르 패닝이 주연을 맡았고, 니콜 키드먼이 런던 펑크족들의 리더격인 인물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 상영을 기다렸던 작품이었는데, 파리에 도착한 첫날 영화가 일정 중에 개봉한다는 지하철 광고를 보고 시간을 내서 보기로 결정했다. 그 밖에도 <판타스틱 우먼>(2017)으로 국내에 알려진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불복종>(2017)이나 국내에서도 상영 중이었던 개리 로스의 <오션스 8>(2018) 등이 상영 중이었다.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얀 곤잘레스 감독의 <Kinfe+Heart>가 곧 개봉한다는 것을 알리는 현수막도 붙어 있었다. 국내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 예정인 작품이지만, 작품 성격상 개봉은 어려워 보인다. 궁금했던 작품인데, 이 곳에선 언어의 장벽 때문에 관람하지 못하고, 한국에서는 영화제 보이콧 때문에 관람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기만 하다.
티켓을 발권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티켓 가격은 9유로 정도이지만, 학생 할인(만 25세까지 적용)을 받아 7.90유로에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이 곳 또한 화장실에 로비에 있는 것이 아닌 상영관 내부에 위치해 있었다. 다행히 스크린 옆이 아닌 맨 뒤편에 위치해 있었는데, 영화 상영 도중 화장실에 갈 일이 생겼을 때는 화장실이 외부에 위치해 있는 것보다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영관의 시설은 CGV 청담이나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를 연상시킨다. 스크린이 좌석에 비해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앞뒤 좌석의 단차도 그다지 높지 않다. 또 하나 의외였던 점은 좌석 팔걸이에 컵홀더가 없다는 점이다. 파리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음료를 마시지 않는 것인지, 혹은 다소 걸리적거리더라도 손에 들고 마시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평일 낮 시간대라 관객이 많지 않았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이 곳의 관객들 또한 연령대가 높았다. 존 카메론 밋첼의 영화가 노년층 관객들이 즐길만한 영화라고는 쉽게 생각되지는 않는데, 이 곳의 관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How to talk to Girls at Parties> 자체는 아쉬움이 남았다. 내게 익숙한 미국식 영어 발음이 아닌 영국식 발음이었기에 대사를 많이 놓쳤기도 하지만, 다소 황당한 설정의 SF영화였기에 더욱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의상이나 세트 등의 미술적인 부분부터 각본과 몇몇 싸이키델릭한 연출까지 보고 있자면 존 카메론 밋첼의 괴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리에서 베니스로 이동하기 전 시간이 남아 다시 극장을 찾았다. 하필이면 출국하는 날 개봉하는 바람에 국내에서 보지 못했던 <오션스 8>을 파리에서 관람하기로 했다. 원래 귀국해서 관람하려 했지만, 점점 줄어드는 시간표를 보니 놓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관람하게 되었다. <How to talk to Girls at Parties>과 같은 극장의 다른 상영관에서 관람하였다. 이 곳 또한 화장실은 상영관 뒤편에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시설 또한 유사했다. 아무래도 같은 극장이다 보니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원래 <불복종>을 볼지, <오션스 8>을 볼지 걱정하다가 결국 이 작품을 선택했는데, 지금은 조금 후회가 된다. <오션스 8>이 아쉬운 영화라서가 아니라(물론 아쉬운 부분이 있는 작품이긴 하지만), 아직도 <불복종>의 국내 개봉 또는 영화제 등에서의 상영 소식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바보같이 놓쳐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후회가 든다. 해외여행을 가서까지 극장을 찾는 관객이 겪는 고민이랄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이었지만, 유럽에서 경험한 극장의 기억은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