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를 보고 영화에 등장한 장소를 방문하고 싶어 지는 것은 당연한 심리처럼 느껴진다. <중경삼림>(1994)을 보면 홍콩이 가고 싶어 지고, <카페 뤼미에르>(2005)를 보면 도쿄의 철로를 보고 싶어 지는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많은 여행객들이 자신의 일정에 영화 속 명소들을 집어넣고는 한다. 나도 얼마 전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2001)에 등장한 킹스크로스 역이나, 드라마 <셜록>에 등장한 베이커가 221B, <로마의 휴일>(1955)의 진실의 입 등을 다녀왔다. 대부분의 영화 촬영지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있으며, 인근 기념품 샵에서 각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상품들을 팔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명소들을 직접 방문하는 것은 영화를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몇 년 전엔 영화의 한 장면을 프린트하여, 촬영 장소를 방문하여 장소에 사진을 맞춰 넣는 방식의 인증샷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직접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는 것은 영화 관람의 새로운 경험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 내가 방문했던 곳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어떤 여행지를 방문한 뒤에 관람한 영화에서 우연찮게 방문했던 장소가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저번 달,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5:17 파리행 열차>(2018)을 감상했다.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향하는 열차에서의 테러를 막아낸 미국인 청년 세 명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실화의 주인공들을 직접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한 작품이기에 더욱 궁금했던 작품이었다. 영화 속 세 청년은 유럽여행을 계획한다. 그들이 찾은 방문지는 다름 아닌 로마와 베니스였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찾는 장소가 바로 며칠 전에 방문했던 장소들인 것이 새삼 신기했다. 게다가 주인공들이 관광객 신분으로 유럽을 찾은 만큼, 영화가 인물들과 장소를 담는 구도 또한 관광객들의 시선과 유사했다. 영화를 보며 내 핸드폰에 담긴 사진들과 영화에 쓰인 쇼트들의 구도를 비교해보니 여러모로 비슷했다. 본의 아니게 영화를 보며 로마와 베니스에서의 여행을 복기하게 됐다. 홀로 떠난 여행이기에 여러모로 심심한 시간들이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와 함께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가 그것을 주제로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오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파리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영화에 등장한 공간들을 보며 그저 “저곳이 파리구나……”하는 생각만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다녀온 뒤에 영화 속 파리라는 공간을 보는 것은 조금 더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 관람한 영화는 스탠리 도너의 <샤레이드>(1963)이다. 영화를 보며 오드리 헵번과 캐리 그랜트, 월터 메튜가 추격전을 벌이는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리게 되었고, 55년 전과 현재의 파리 지하철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조금 놀랐고, 같은 공간의 다른 계절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보면서 12, 13구에 병원이 많다는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센 강을 건너면 바로 13구로 이어지는데, 이 곳엔 영화에 등장한 피티에 살페트리에 대학병원을 비롯한 여러 병원들이 모여있다. 여행 계획을 짜면서부터 파리를 떠날 때까지 가장 많이 켠 앱이 구글맵인 만큼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되었다.
오늘 본 세 편의 영화 중 가장 놀라운 경험은 홍상수의 <밤과 낮>(2007)을 볼 때였다. 영화의 주인공인 성남(김영호)은 대마초를 피운 이후 경찰을 피해 파리로 도주한다. 그가 택시를 타고 숙소 앞 거리에 내린 순간 스크린에 보이는 길거리에 모습이 익숙했다. 성남이 짐을 끌고 들어간 건물의 문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 그가 찾은 한인민박은 내가 파리에 머물 때 묵었던 곳이었다. 물론 나는 성남처럼 두 달 반 정도의 기간을 머무르진 않았다. 5박 정도의 짧은 (하지만 길다면 긴) 시간을 머문 곳이었지만, 여러모로 즐겁고 편안하게 머물렀던 곳이었다. 한국도 아니고 파리라는 머나먼 공간에서 묵었던 장소를 극장 스크린에서, 그것도 필름으로 본다는 것은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심지어 <밤과 낮>은 2007년에 제작된 작품이기에 11년 전 숙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숙소 사장님 내외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대신 기주봉 배우가 민박의 주인을 연기했다) 숙소가 숙소이다 보니, 성남이 찾는 성당과 카페, Pernety 지하철역, 숙소 인근이라던 유정(박은혜)과 현주(서민정)의 집의 위치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특히 성남을 비롯한 인물들이 자주 찾던 공간인 Pernety 역 앞의 카페는 숙소에서 도보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다.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월드컵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숙소 인근에서 걸어 오르세 미술관까지 갔다는 대사에 정말 많이 걸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어느 때보다 영화 속 인물의 일상에 가깝게 다가간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물론 민박의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너무 놀라 영화 초반부에 집중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여러모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파리를 방문하기 전에 <밤과 낮>을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먼저 보고 그 장소에 가는 것과, 그 장소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연이 영화 속에 등장한 장소를 발견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욱 즐거운 경험일까?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대부분 유명한 관광지인 경우가 많다. 노트르담 대성당, 퐁네프 다리, 오르세 미술관 등은 이미 너무 많은 영화들에 등장했고, 이를 일일이 헤아려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나 싶은 수준이다. 하지만 <밤과 낮>에서 직접 묵었던 숙소가 등장하는 경험은 어딘가 달랐다. 그것도 홍상수의 영화에서, 영자원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심지어 필름으로 이를 맞이하는 순간은 어딘가 괴이했다. 가까운 기억이기에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미지와 스크린에 영사되는 이미지가 겹치는 순간은 아마 올해 가장 강렬한 경험으로 남을 것만 같다. 영화를 통해 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한 것만으로도 폭염을 뚫고 영상자료원에 다녀온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