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들도 그랬지만, 그의 신작인 <킬링 디어> 또한 굉장히 불쾌한 작품이다. <더 랍스터>에 녹아들어 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 덕분에 나름 즐기면서 볼 수 있었지만, <킬링 디어>는 <송곳니>만큼이나 관객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불쾌함으로 가득하다. 아니 사람에 따라 더욱 불쾌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그리스 신화 속 비극 이야기 중 하나인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를 영화의 줄거리로 가져온다. 신화는 트로이의 장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여 그의 분노를 사고,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쳐 그 분노를 달래려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의사인 스티븐(콜린 파렐)이 수술 중 마틴(배리 케오간)의 아버지를 사망하게 만들고, 마틴이 그에 대한 복수로 스티븐과 안나(니콜 키드먼) 사이의 두 자식인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을 죽이려고 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틴이 사용하는 방법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범죄수단이 아닌, 초현실적인 저주의 형태로 드러난다. 영화는 저주의 이유와 원인을 천천히 드러내며 관객을 모호함 속으로 이끌어간다.
여러모로 나홍진의 <곡성>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끼를 물어버리고, 그들은 영화 밖에서 신적인 위치에 군림하고 있는 감독에 통제 하에 있는 모호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의 인물들은 혼돈 속에서 애처롭게 방황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러한 방식의 영화는 혼돈을 감독이 관객과 벌이는 야바위처럼 다룬다. 결국 감독의 속임수에 관객은 낚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은 착취당한다. <킬링 디어>의 인물들은 굉장히 건조한 톤으로 대사를 내뱉는데, 그들의 말은 극단을 오가는 음악과 상반되어 관객에게 불안감을 주입한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트래킹, 줌인/아웃 등을 반복하는 카메라는 대사의 톤과 음악이 주는 상반되는 분위기에 적당히 편승한다. 결과적으로 <킬링 디어>는 <곡성>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통제하는 주입된 불안감 속에서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작품이다. 때문에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신화의 형식 안에서 감독의 위치는 신에 해당한다.
<더 랍스터>의 인물들에겐 최소한의 선택지가 있었고, 결국 탈이분법적인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두 주인공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송곳니>는 한 가정을 통제하려는 그릇된 가부장의 독재 하에서 착취당하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에서 <더 랍스터>의 탈주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송곳니>의 가부장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이나 인간 사이의 불신 같은 소재와 주제들은 란티모스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기 위한 주춧돌로서 기능한다. 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서 쓰러지는 밥의 모습을 부감으로 촬영한 장면 등은 란티모스의 욕구를 드러낸다. 이피게네이아 등의 신화를 현대의 독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서술자가 신이 아닌 관찰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서술한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라는 신화적 이야기에서 신의 위치에 서길 욕망한다. 그러한 욕망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