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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2. 2019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십대 청소년들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쓴 십대 섹슈얼리티 인권모임은 청소년의 성, 연애, 성소수자, 성폭력, 임신 등을 포괄하는 인권단체다. 이곳은 ‘나는 처녀가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했었다. 과열된 입시경쟁과 그것 외에 다른 것을 하는 청소년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는 청소년들을 무(無)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그들의 성행위는 물론 연애까지 금지하고 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나는 처녀가 아니다.’ 캠페인에 전달된 몇 가지 사연들을 제시한다. 피임, 임신, 성정체성, 성과 연애에 대한 억압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연들이다. 이러한 사연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입시경쟁에 경도된 사회와 개인들이 청소년의 성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이야기를 ‘연애·성’, ‘성소수자’, ‘가족’, ‘임신·출산·피임·낙태’, ‘성폭력’의 다섯 가지 챕터로 나누어 풀어간다. 각 챕터는 여러 청소년 혹은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의 청소년 시절 경험담으로 구성된 ‘선언’이 들어가며, 그 이후에 여러 필자의 글이 이어진다.

‘연애·성’ 챕터의 선언에서는 “학교에서 연애를 금지해서 헤어졌다”, “연애는 하지만 청소년은 모텔을 갈 수 없어 더러운 장소에서 섹스할 수 밖에 없다”, “이성교제 금지 교칙 때문에 이성끼리 나란히 걷기만 해도 처벌받는다.”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학생 신분이므로 연애할 자유를 억압당하고, 남녀공학에서도 남녀분반으로 공간이 분리되고, 임신·피임·섹스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한다. 첫 번째 글은 섹스할 곳을 찾지 못해 멀티방을 가야 하는 청소년의 처지에 대해 쓰고 있다. 법적으로 숙박업소에서 미성년자의 이성간 혼숙은 금지되어 있기에, 대부분의 청소년은 우회적인 장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공간에서 결국 섹스를 포기했고, 그것이 결별로 이어진 경험을 서술하며 청소년의 성에 대한 억압이 폭력적임을 고발한다. 이어지는 글은 학교 내 연애금지에 관한 이야기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전국 주요 지역의 중고등학교 354곳 중 81%인 286개 학교에서 학생들의 이성교제나 신체접촉을 금지하는 교칙이 있다고 한다. 사실 학교 대부분에 이와 유사한 교칙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교칙을 통한 징계는 전학이나 강제전학, 퇴학 등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학교나 교육청 등은 학생의 풍기문란을 문제라고 하지만, 결국 그들이 통제하는 것은 청소년의 성이다. 이것은 ‘사랑할 권리’라는 기본적인 인권을 탄압하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두 글은 청소년유해매체에 관한 글이다.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유해매체를 지정할 대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법이다. 이 법은 성행위나 흡연 등의 행위가 담긴 영상매체나 사진 등을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하여 청소년들의 접근을 막는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실효성 있는 제도이며, 보호의 명목으로 청소년의 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은 1997년 <도라에몽> 등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청소년유해매체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되짚으며, 이 제도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것과,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청소년유해매체 지정은 단순히 청소년이 성인물에 접근하는 것을 한 단계 귀찮게 만드는 것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동시에 이러한 제도는 누구나 지닌 욕구인 성욕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게 한다. 성욕이 있는 주체들에게 성적인 콘텐츠를 규제하고 동시에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방치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폭력적인 콘텐츠가 문제라면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콘텐츠를 바꾸는 것이 먼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성과 섹스를 성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다루고 있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청소년은 당연하게도 섹스할 수 있는 성적 주체이고, 이들을 성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억지에 가깝다. ‘미성년자의 성행위는 사회적 금기이므로, 적발 시 퇴학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공정택 후보가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선은 보호와 성 윤리라는 명목하에 청소년의 성을 규제하고 억제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청소년은 보호의 대상으로 전락하며, 이 과정에서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박탈당한다. ‘연애·성’ 챕터의 마지막 글은 초등학생을 다닐 어린이의 성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이의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지만, 필자는 아동발달이론에서 조차 “어린이는 출생 후 3세까지 자신의 성 주체성을 확립하며, 소아기에 섹슈얼리티의 패턴을 획득한다.”라고 이야기한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학교와 사회는 어린이를 무성적이고 무지하며 순수한 존재로 보고 그들의 성을 부정한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은 제공되지 못하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처벌하기만 할 뿐이다. 만약 어린이가 성적 주체가 되기에 이르다는 전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성적 주체가 될 어린이에게 우리 사회는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돕지 않는다. 민주주의 원칙을 교육하기 위해 학생회를 조직하게 하고, 이것에서 실패했을 경우 사고나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돕는 것처럼, 아이들의 성 또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어지는 챕터는 ‘성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교와 가족, 사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사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속 이야기들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보호라는 명목 하에 십대 청소년들의 성을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모든 면에서 이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청소년 성소수자의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은 정상적이지 못한 것으로 분류되며, 이들의 삶은 학교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설령 학교 안에서의 생활 혹은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학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별 정체성 혹은 성적지향에 대한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고민은 사춘기 시절의 한 때로 치부되고, 기본적인 성교육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당장 자신의 정체성이 아웃팅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하며 학교에 다니다 결국 학교 밖으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경우, 대부분의 성별정정 치료 및 수술에 있어서 보호자의 동의가 필수적이고, 청소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비용이 들기에 그들의 정체성을 실현하는데 더 많은 어려움이 든다. ‘청소년 트랜스젠더 이야기’라는 글은 이러한 과정을 세세하게 서술하며, 청소년 ‘트랜스젠더’이기에 가해지는 억압을 고발한다. 이 챕터의 마지막 글인 ‘엑스존에서 학생인권조례까지,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을 돌아보다’라는 글은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해온 필자의 경험을 통해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청소년 성소수자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억압당하고 차별받아왔는지를 되짚어 보고, 그것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엔 어떤 것이 있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세 번째 챕터는 ‘가족’이다. 이 챕터에서의 가족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가족에 의한 차별과 폭력, 그리고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벗어난 생활을 하는 십대 청소년의 이야기가 한 가지고, 정상가족으로 치부되는 범주에서 벗어난 가족의 생활을 다루는 이야기가 다른 한 가지다. 두 개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묶인다. 살 곳을 위해 집을 계약한다든가,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경우, 청소년은 법적으로 제약을 받는다. 만 20세 미만의 청소년이 집을 계약했을 경우 보호자의 요청이 있으면 바로 계약파기가 가능하며, 만 16세 미만의 청소년은 법적으로 노동할 수 없는 나이다. 게다가 성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원하는 점주들의 요구는 청소년을 정상가족의 보호가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또한, 사회는 가정 밖의 청소년을 위기 청소년 혹은 탈선 청소년 등의 이름으로 명명하며 그들의 위치를 불온한 것으로 만든다. 근대에 설계된 현대 가족제도에서 가정 밖 혹은 결손가정이라 불리는 가족형태 속의 청소년은 위기에 놓인 것으로 분류되며, 청소년들은 이러한 분류에 기반을 둔 시선의 압력과 폭력을 견뎌내야 한다. 청소년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규정한 뒤 많은 부분을 가정에 맡겨버리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청소년을 보호하기는커녕, 그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뿐임을 이 챕터에서 지적하고 있다.

네 번째 챕터는 ‘임신·출산·피임·낙태’에 대한 이야기다. 아마도 청소년의 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부분일 것이다. 청소년의 섹스를 억압하는 가장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청소년은 당연히 임신 가능한 존재이다. 동시에 피임법 등에 관한 제대로 된 성교육이 진행되지 않고 있기에, 청소년의 임신 가능성은 더욱 크며, 성교육 없이 성인이 된 청소년들 또한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고 청소년의 섹스 혹은 임신과 출산, 육아를 보호를 명목으로 억압하고 없는 것으로 치부해야 할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임신, 출산, 낙태 등을 경험한 다양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피임법을 몰랐기에 임신하게 된 청소년,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길 원하는 청소년, 낙태를 선택하고 싶으나 이것이 불법이며 경제적으로도 압박이 크다는 청소년 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된다. 피임법에 대한 교육이 없어 청소년의 임신 가능성을 사회가 스스로 높이고 있으면서도, 출산과 낙태 어느 쪽의 선택도 쉽게 이어갈 수 없도록 임신한 청소년을 낙인 찍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혼모 등의 명명은 임신한 여성 청소년을 더욱 폭력적인 시선으로 낙인 찍는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피임 교육과 임신 이후 출산 및 육아와 낙태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다. 사회는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고 보호하기는커녕, 모든 책임을 청소년 개인과 가정에 넘기고 방치한다.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낙인 찍기를 멈추고, 청소년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보장해야 할 것이다. 챕터의 뒤쪽에는 여러 피임법과 임신 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곳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피임법을 잘 모르는 성인이게도 필수적인 정보일 것이다. 이것을 이 책이 아닌 학교 등의 채널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마지막 챕터는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십대 청소년은 경제적,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고, 제도적, 사회적으로 통제되는 신분이기에 쉽게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이것은 단순히 교통사고처럼 외부에서 갑자기 습격해오는 문제가 아닌, 가정, 학교, 학원 등 청소년들이 언제나 노출된 공간에서 벌어진다. 또한 입시경쟁을 부추기며 학교 내 성추행 등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문화나, 입시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해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문제다. 청소년을 성적으로 순결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성을 통제하려 함과 동시에, 그들의 성을 착취하려고 하는 성인들은 학교와 가정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곳에 존재한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을 음지로 몰아넣는 현실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다. 챕터의 뒷부분에는 성폭력을 당했을 때의 대처방법이 적힌 부록이 있다.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통로와 대처방법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앞서 수록된 피임법과 임신 시 대처방법 매뉴얼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용을 학교 등 공적인 통로로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를 고르게 된 이유는 최근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스쿨미투 운동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을 통해 폭로된 내용은 이미 충격을 넘어선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대학입시만을 초·중·고등학교 12년 교육의 유일한 목표로 만들고, 그것에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교사들에 의한 성추행과 성희롱은 십대 청소년의 성에 대한 통제와 맞물려 괴이한 방향으로 왜곡되고, 도리어 청소년의 성을 더욱 억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은 교복을 줄여 입거나 문란한 성을 즐기고 성적인 컨텐츠를 접하는 청소년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리고, 정작 이들을 보호해야 할 교사, 학교, 사회, 국가의 책임은 일정 부분 휘발되어 버린다. #스쿨미투 운동으로 다시 한 번 촉발된 교사들의 성폭력 문제와 입시를 볼모로 잡고 이러한 폭로를 무력화시키려는 구조에 대한 분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커졌다.

나는 서울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 강원도에 있는 대안학교, 경상남도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러한 다층적인 경험 속에서, 책에 묘사된 것과 같은 탈학교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당장 나와 내 주변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비인가 대안학교 학생은 공식적으로는 탈학교 청소년으로 분류되고, 나는 검정고시를 통해 중졸 학력을 얻었다.) 학교들에 다닐 당시에는 지각하지 못했지만, 성인이 되고 페미니즘을 접하고 퀴어인 친구들을 만나게 되며 내가 졸업한 학교와 청소년을 대하는 시선이 지닌 성차별적인 구조와 통제에 따른 폭력들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이러한 인지를 바탕으로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게 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든 생각은 간단하다. 청소년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논하는 기성세대의 논리는 끔찍할 정도로 모순적이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사정이 안 되더라고 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관심을 잃지 않으며 연대해야 한다. 한 때 십대 청소년이었던 사람으로서, 앞으로 십대 청소년이 될 사람을 양육하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당장 주위에 있는 십대 청소년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아니 지금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위해 십대 청소년의 권리는 보장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종종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대자보가 붙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내가 졸업한 학교는 기독교 재단에서 세운 곳으로, 남녀공학이지만 남녀의 성비가 2:1인 곳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남자들은 트렁크 팬티가 다 보일 정도로 짧고 통이 넓은 축구 유니폼을 입고 학교를 누비고 다녔지만, 여자들은 무릎이 보이는 반바지를 입으면 교사로부터 주의를 받았다. 강제적인 교칙으로 명문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수준이랄까?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도 이러한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은 몇몇 학생들에게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서 변화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학교의 성차별적인 문화를 지적하는 대자보가 붙었다는 소식은 잊고 있었던 학교의 성차별적 문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성을 억압하고, 청소년 개인이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2018년은 몇몇 여성학자들이 명명한 페미니즘 리부트의 시대가 온 지 몇 년이 흐른 시점이다. 십대 청소년들이 무성적인 존재로 취급받지 않고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될 수 있는 발판이 준비된 것으로 생각한다.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와 같은 책을 통해 십대 청소년의 성에 대한 문제들이 가시화되고, 모든 세대의 진정한 성평등을 이룰 수 있도록 언제나 연대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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