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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2. 2019

<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한국의 개념미술가 또는 설치미술가로 알려진 박이소는 국내 미술계에 포스트 모더니즘 예술론을 소개한 작가로 알려졌다. 그는 1981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미국 뉴욕에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라는 이름의 대안공간을 열였으며, 2004년 작고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정체성이다. 한국인, 유학생, 이주민, 소수민족 등 정체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82년 뉴욕에 거주하게 되면서 시작되었고, 이는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 중인 <박이소: 기록과 기억>은 그의 유족이 기능한 작가노트, 드로잉, 기사, 강의자료 등의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돌아볼 기회였다.


과천관 1층의 제1전시실 전체를 사용한 전시는 작가노트와 드로잉 등의 아카이브를 중앙에 배치하고, 그 주변을 박이소의 작품들로 채웠다. 마치 육상트랙을 연상시키는 전시의 디스플레이 방식은 뉴욕과 서울에서의 작품활동이라는 분기점을 명확하게 하며,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중앙에 위치한 아카이브를 통해 접할 수 있도록 배치함으로써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러한 디스플레이 방식은 뉴욕 거주 당시 박이소가 느꼈던 정체성의 문제가 서울로 돌아와 시작한 세계에 대한 유머러스한 작업들로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박이소의 본래 이름은 박철호이다. 그는 뉴욕으로 건너간 뒤 이름을 박모로 바꾼다. 여기서 모는 박모 씨처럼 이름을 익명화하는 수단으로써의 모(某)이다. 그는 자신이 운영한 대안공간 ‘마이너 인저리’에 대한 선언문에서 이 공간을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수에 속하거나 이와 연관된 관심을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들, 분쟁지역 국가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이민 온 작가들을 위해 운영한다고 밝힌다. 박모는 미국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제3세계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함과 동시에, 자신 스스로도 이를 표현하는 작품들을 제작한다. 전시 초반부에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작품들이 이러한 박모의 관심을 반영한다. <잡초도 자란다>(1988)를 비롯한 바보서예 작품들, <인간적/비인간적>(1987)을 비롯한 ‘~적’이라는 제목의 연작 등이 이를 드러낸다. 특히 ‘마이너 인저리’의 모습을 재현해 둔 공간 앞에 놓인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1989)과 전시에서 뉴욕 시절과 서울 시절을 가로지르는 분기점 직전에 있는 작품 <쓰리 스타 쇼>(1994)는 정체성에 대한 박모의 관심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그조틱-마이노리티-오리엔탈>은 뉴욕에 거주하는 제3세계 작가라는 모순적이며 갈등적인 박모의 정체성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패션잡지에서 등장할 것 같은 전형적인 사진 세 장 위에 이그조틱, 마이노리티, 오리엔탈이라는 세 단어를 서예체로 적은 작품이다. 세 개의 단어는 각각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흑인 모자, 동아시아계 여성의 사진을 각각 라벨링한다. 이 사진들은 미국사회의 주류인 백인 남성에게 이러한 단어들을 들려주었을 때 떠올릴 법한 이미지들이다. 박모는 각각의 사진에 영어 단어들을 한국식 어절로, 서예체로 적음으로써 자신이 겪는 갈등적 상황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영어와 한글을 모르는 관객에겐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다. 만약 한국어를 아는 외국인 관객이 이 작품을 본다고 해도, 그저 신비하게 생긴 글자인 한글이 적힌 작품일 뿐이다. 더욱이 한국인들에게 박모의 서예체는 어설프게 전통을 따라 한 것으로 보이기만 한다. 박모의 이러한 작품은 미국사회 내에서 주류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제3세계인이라는 정체성의 작가가, 주류가 지닌 이국적 취향에 호소하려는 하나의 전략이 적용된 작품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가짜 전통에 대한 박모의 유머러스한 작품은 서구 주류의 관중들을 위해 과거의 전통을 끌어와야 하는 제3세계인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보여준 셈이 된다.


<쓰리 스타 쇼>는 간장, 코카콜라, 커피를 각각 이용해 세 개의 별을 그린 작품이다. 세 가지의 재료는 유사한색을 지녔기에 육안으로 분간하기 어렵다는 특징을 지닌다. 각각의 재료들은 동양과 서양의 것이라는 관념을 통해 이를 구분 지으면서, 동시에 육안으로 분간할 수 없는 세 가지 재료의 색을 통해 이분화된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지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쓰리 스타 쇼> 옆에 전시된 <삼위일체>(1994)에서도 드러난다. <삼위일체> 또한 간장, 코카콜라, 커피를 재료 삼은 작품이지만, 이들 재료는 짜장면이라는 하나의 형상을 그리는 데 사용된다. <쓰리 스타 쇼>가 캔버스라는 한 공간 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재료들을 드러냈다면, <삼위일체>는 세 가지 재료가 뒤섞여 있는 상태임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미국이라는 공간 안에 다양한 문화적,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혼종적으로 존재하는 전 지구적 상황을 재료를 통해 폭로하는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박모의 고민은 빌리 조엘의 노래 ‘Honesty’를 한국어로 개사하여 직접 부른 작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국문화와 미국문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디아스포라적 위치와 경험을 통해, 이러한 경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박모는 1995년 서울로 돌아온 이후 우리에게 이름을 박이소로 바꾼다. 이소(異素)라는 이름은 ‘바탕이 다르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운 뉴욕 시절의 박모라는 이름에서, ‘바탕이 다르다’는 것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의 존재 방식을 표명한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박이소는 캔버스를 기반으로 했던 뉴욕 시절과는 다른 형식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서울 시절 작품들은 주로 설치작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뉴욕 시절에 겪은 정체성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한국이라는 배경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장한다.


서울 시절의 첫 공간을 차지하는 <무제(한 평)>(2001)과 <무제(헬리콥터)>(2000)은 한 평(3.3㎡) 크기의 에어캡 위에 축소된 벤치와 지점토로 만든 헬리콥터 모형을 각각 올려 둔 것이다. 부동산에 관한 관심으로 가득한 한국사회에서, 한 평은 공간의 단위이자 부동산의 가격을 정하는 단위이다. 박이소는 한 평의 공간 위에 축소된 사물의 모형을 올려 둠으로써 좁은 공간이 넓게 보이는 착시를 유도한다. 이는 실제로 좁은 공간일 수밖에 없는 한 평의 크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접근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머는 이후의 작품들에도 이어진다. 가령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인 <베니스 비엔날레 모형>(2003)과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1~10위>(2003)는 각각 베니스 비엔날레에 대한 유머러스한 비판을, 서구 주류 자본과 이를 따라가려는 동아시아 자본이 트로피처럼 건설한 초고층 빌딩들의 권위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의자에 세계지도와 검은 원이 그려진 종이를 붙인 <월드 의자>(2001)와 <블랙홀 의자>(2001)는 의자에 앉으면 가려지는 세계와 블랙홀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내며 박이소의 냉소적인 유머를 이어간다. 너무 밝아 도리어 보이지 않는 <당신의 밝은 미래>(2002)의 빛이나, 별이 8개가 붙어 있어도 그것을 자연스레 북두칠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북두팔성>(1997~1998), 그의 유작인 부산비엔날레 출품작 <우리는 행복해요>(2004) 등의 작품들도 그러하다. 박이소의 서울 시절 작품들은 서구 주류 사회가 만들어낸 수많은 경계와 이를 재생산하는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비판과 유머를 담아낸다는 공통점을 지니며, 여기에는 박이소가 뉴욕 시절 경험한 정체성의 고민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드넓은 세상>(2003)이다. 어설픈 세계지도 위에 ‘세짐브라’, ‘아라라쿠아라’ 등 어디 있는지도 모를 작은 도시들의 이름을 빼곡히 적어 놓은 이 작품은, 주류를 차지하는 대도시들 이외 지역의 이름들은 그저 세계 위에서 표류하는 공허함을 드러내는 기표가 된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오가며 이를 허물고자 했던 박이소의 작품세계와 아카이브를 통해 이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전시의 핵심이 이 작품에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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