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을 조롱하는 블랙 판타지

데이빗 핀처의 걸작 <파이트 클럽>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스포일러 주의


<파이트 클럽>은 영화 전체가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같다. 기다란 하나의 플래시백으로 진행되는 영화는 타일러 더든의 뇌 속을 따라가듯 자유분방하다. 플래시백이 시작하자마자 “좀 더 뒤로 가볼까?”라고 말하며 과거 장면으로 이동하고, 제4의 벽을 뚫고 관객들에게 영화 큐 마크를 설명하기도 한다.(심지어 그 장면에서 큐 마크를 스크린에 띄우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플래시백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고 대사를 날리기도 한다. 영화의 화자인 나레이터(에드워드 노튼, 배역 명이 나레이터)와 타일러 더든이 동일인물이었음을 생각해보면, 하나의 긴 플래시백은 화자의 상태를 완벽히 반영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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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대 문명의 물질적 속성을 폭력으로 부순다. 에드워드 노튼의 집이 폭파되고 불타는 가구들을 지나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부터 영화는 조금씩 파괴를 시작한다. 일상이라고 생각한 시간표처럼 반복되는 나날과 완벽히 구성된 집안의 가구들이 주는 물질적 편안함, 그리고 자신의 육체까지 파괴한다. 영화의 마지막 금융회사를 파괴하는 것은 모두의 채권을 없애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닌 것들(자본, 제도 등)이 현대사회를 지배하기에 물질적 안정과 눈에 보이는 상징에 사람들은 집중한다. 타일러 더든은 그것을 파괴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까지 파괴하려 한다. 에드워드 노튼이 타일러 더든이라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낸 이유는 결국 현대사회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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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의해 돌아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핀쳐의 시선은 <파이트 클럽>이후에도 여전하다. SNS가 얼마나 ‘소셜’한지 페이스북 창시자의 이야기를 빌려 물음을 던지는 <소셜 네트워크>와, 미디어의 속성을 이용해 결혼제도를 비꼰 우화 <나를 찾아줘>는 <파이트 클럽>이 던진 화두 아래에 있다. 사람의 존재는 물리적인데 우리의 행동은 점점 물리적이지 않은 것들에 지배당한다. 타일러의 이상을 결국 현실로 만든 영화의 엔딩 이후가 궁금해진다. <파이트 클럽>은 영화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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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트 클럽>은 현대사회의 허상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블랙 판타지이다. 블랙 코미디보단 블랙 판타지라는 단어가 아무래도 더 어울린다. 당장 일상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발목이 묶인 사람들에게는 타일러 더든이 오히려 허상이다. 이상이 결국 현실이 되며 끝나는 엔딩은 물론, 타일러 더든의 모든 행적이 판타지이다. 결국 <파이트 클럽>은 이룰 수 없는 것을 대리해주는 판타지이다. 대신 판타지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어마어마하다. 그래서 핀쳐는 영화의 엔딩에 포르노의 한 컷을 집어넣은 것일까? 영화 내내 등장하는 스타벅스 커피에 담긴 자조가 영화를 더더욱 판타지로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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