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스페리아> 루카 구아다니노 2018
*스포일러 포함
다리오 아르젠토의 1977년작 <서스페리아>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서스페리아>는 조악함을 감추지 않는 고어 특수효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직선적인 서사, 색이 강조되는 화면 등의 요소가 장르영화적 쾌감으로 돌진하는 60~70년대 이탈리아 ‘지알로 호러’의 대표작(사실 엄밀히 따지면 <서스페리아>가 지알로적 요소를 대표한다고 보긴 어렵지만, 그 상징성 면에서는 가장 인지도 있는 작품일 것이다)으로 불리고 있다. 40년이 지나 구작은 4K로 리마스터링 되어 블루레이 출시 및 몇몇 국가에서 재개봉되었고, 새로운 작품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그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담담한 사람이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으로 익숙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다.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이탈리아 출신 감독이지만, 아르젠토와는 물론이거니와 호러 장르 자체와 크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연출자이기에, 그가 <서스페리아>를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그의 거의 전작에 출연한 틸다 스윈튼이 이번에도 출연하고, 역시 그의 전작을 거의 함께한 편집자 월터 파사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사욤브 묵딥록 촬영감독 등 기존의 ‘구아다니노 사단’이 이 영화에 그대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밴드 라디오헤드의 프론트맨 톰 요크가 이 영화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고(그의 첫 영화음악 참여작이다), 미리 발매된 스코어 앨범이 많은 관객들의 기대치를 올려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원작과는 다른 우중충한 색감, 152분이라는 러닝타임, 밴드 고블린의 광기 넘치는 원작의 사운드트랙에 매료되었던 팬들은 계속해서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1977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굳이 베를린이 아니었어도 가능했을 이야기인 원작과 다르게, 1977년 동서로 분단된 베를린의 정치적, 시대적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원작에 없던 캐릭터인 페트리샤(클로이 모레츠)가 요세프 박사(틸다 스윈튼)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배경은 1977년 적군파가 주도한 시위가 벌어지는 서베를린의 시내 한복판이다. 그밖에도 뉴스를 통해 적군파와 비더-마인호프, 요세프와 그의 아내 이야기를 통해 등장하는 동서독 분단의 이야기, 심지어 시대를 조금 거슬러 올라가 나치즘까지 영화에 등장한다. 영화 내에서 적군파가 무엇인지, 이들이 왜 항공기에서 테러를 감행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기에, 냉선시대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모르는 관객들에겐 당황스럽게 다가올 내용들이다.
이렇게 구아다니노는 원작에서 전혀 다루지 않았던 ‘1977년 서베를린’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지만, 이것이 ‘호러’의 배경이 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호러’는 나치즘부터 냉전시대까지 잔존한 파시즘의 폭력을 처벌하는 과정의 기괴함에 있다. 수지 베니언(다코다 존슨)이 찾아간 마르코스 무용단은 자신들이 마녀임을 숨기고 있는 마르코스와 블랑(두 캐릭터 모두 틸다 스윈튼이 연기)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한숨의 마녀 ‘서스피리움’을 위한 의식에 사용하기 위해 무용단원 중 재능 있는 사람을 골라내려 한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마르코스와 블랑, 두 파로 나뉜 마녀들의 파벌싸움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고, 무용단과 적군파 활동을 병행하던 페트리샤를 비롯해 수지의 친구인 사라(미아 고스) 등이 희생되기도 한다. 영화는 결국 수지의 몸을 그릇으로 삼아 나타난 ‘서스피리움’이 분열과 폭력을 일삼는 모두를 몰살시키고, 이것의 목격자인 요세프 박사의 기억을 지워주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된다.
원작의 열렬한 팬으로서, 동시에 루카 구아다니노가 전작들에서 정치적 문제들을 담아내는 방식에 동의하지 못했던 사람으로서, 이번 <서스페리아>는 실망스러웠다. 우선 “무용단을 운영하며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 마녀”라는 원작의 설정을 끌어다, 1977년 당시 독일의 상황, 더 나아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정치적, 사회적 분란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못했기 때문이다. 원작의 설정이 지닌 장르적 요소에 다양한 맥락을 첨가하는 것은 분명 흥미롭고 장려해야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요세프 박사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너무나도 많은 맥락들을 원작의 설정 안에 욱여넣었다. 서베를린에 위치한 박사의 집과 동베를린에 위치한 아내와 함께 쓰던 별장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마녀’라는 소재와는 전혀 별개로 진행된다. 에필로그에서 굳이 다시 언급하는 것조차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영화 안에서 “기독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마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특정 시공간에 대한 수많은 맥락을 한 번에 비판하려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현실의 문제들이 초능력자나 초현실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봉합되고 해결되는 영화는 많았지만, <서스페리아>의 ‘서스피리움’은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등장한다. 그는 단지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영화 속 인물들을 처벌한다. “이건 예술이 아니야!”라는 마르코스의 대사가 무색하게, 그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양식화되어 있다. ‘무용’이라는 예술적 형식으로 지신들의 의례를 감추려던 마녀들의 행동은 결국 진짜 ‘마녀’의 등장을 통해 극도로 양식화된 장면을 통해 처벌당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녀에 의해 망각된다. 과거의 폭력을 모두가 잊어버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그 폭력을 대체 누가 망각했다고 이러한 양식화된 폭력의 연속을 영화로 만들었을까? 실제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초현실적 존재의 등장이 어떤 문제 제기나 해결 대신 처벌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연출자 자신이 원하는 어떤 정치적 방향을 곳이 곳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지극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후반부는 정치적인 문제를 간단하게 ‘폭력’의 문제로 치환해버리고, 작가가 그 폭력의 주체들을 자유롭게 처벌할 수 있는 장이 된다. 같은 설정일지라도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가 성공했던 이유는 서사의 꼼꼼함이 아닌, 배경과 설정의 무국적성 때문이다. 원작의 무국적성을 무시한 채, 이탈리아 감독이 1977년 분단 독일의 서베를린을 무대로, 적군파 등 온갖 정치적 소재들을 사용하는 다국적 캐스팅의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제작 과정에서의 다국적성이 영화가 설정하는 한정된 시공간을 온전히 기능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존재 자체로 초국적성을 띄는 존재를 통해 특정 시공간을 이야기하려는 시도 자체는 원래부터 성립하게 어려웠던 것일까?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결국 이런 의문점들만 남긴,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그다지 무섭지 않았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