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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un 01. 2019

수직의 선으로 그어진 계급

<기생충> 봉준호 2019

*스포일러 포함


 봉준호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장르영화감독이었다. 다만 여러 장르들을 독특하고 과격하게 비틀었을 뿐이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범죄 스릴러(<살인의 추억>), 과학자나 군인이 주인공이 아닌 괴수물(<괴물>), 범인이나 경찰이 아닌 엄마가 주인공인 범죄 스릴러(<마더>) 등이 그의 전성기를 장식하던 작품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설명적이었던 <설국열차>, 주제에 함몰되어 장르영화적 동력까지 상실해버린 <옥자>는 만족감보단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았던 작품들이다. 그러던 중, 마침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까지 가져온, 봉준호가 10년 만에 온전한 ‘한국영화’로 돌아온 <기생충>이 개봉했다. 봉준호는 언제나 국지적인 지역이나 사건을 다루면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작가였다. 영화의 무대를 넓힌 <설국열차>와 <옥자>가 그의 전작들처럼 성공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위의 세 작품뿐만 아니라, <지리멸렬>과 <인플루엔자> 등의 단편과 장편 데뷔작인 <플란다스의 개>에도 해당된다. 그는 언제나 한정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장르를 전복시키는 화법을 구사해왔다.

 <기생충>은 코미디, 스릴러, 호러의 경계를 넘나 든다.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반지하방과, 역시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유명 건축가가 지은 호화로운 주택, 이 두 공간을 잇는 긴 수직의 선이 영화를 지탱하고, 이 선을 따라 장르들이 변화한다. 봉준호는 <하녀>, <충녀> 등 김기영의 영화에 등장했던, 그리고 <도쿄 소나타>나 <팬텀 스레드> 등에서 구로사와 기요시와 폴 토마스 앤더슨 등 또한 가져왔던 계단 이미지를 사용한다.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방으로 내려가는 계단, 그 집에서 인근 카페의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올라가야 하는 변기가 있는 역설적인 계단, 박사장(이선균)의 집을 들어가기 위해 올라가야만 하는 현관의 계단, 그곳의 지하실로 다시 내려가기 위한 계단. 수많은 계단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양극화, 이분화된 공간들은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때문에 봉준호가 바라보는 계급은 멀리 떨어진 두 개의 점이 아닌, 기다란 수직의 선으로 연결된 스펙트럼이 된다. 고액과외, 운전기사, 가사도우미라는 이동수단을 타고 기나긴 수직선을 오가는 기택, 충숙(장혜진), 기우(최우식), 기정(박소담)은 도달할 수는 있으나 머무를 수 없는 위 쪽의 점을 탐한다.

 그리고 이들이 위를 탐하는 순간, 역시 아래에서 수직선을 따라 올라온 존재들을 마주한다. 박사장의 집에서 원래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문광(이정은)과 빚쟁이들에 쫓겨 그 집 지하벙커에 숨어 살던 그의 남편(김명훈)이 그들이다. 기택처럼 유행 따라 ‘대만 카스텔라’ 집을 열었다 망해 빚쟁이가 된 이들의 처지는 기택 가족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싸운다. 수직선 맨 아래 같은 점에서 출발한 이들은 협력 대신 기생 가능한 자리를 놓고 싸운다. 싸움의 결과는 익숙하다. <설국열차>에서처럼 시스템을 박살 내는 판타지는 없다. 기생의 자리는 기생하려는 자로 계속 대체된다. 자꾸만 선을 넘는 아래쪽의 냄새는 싸움에 휘말리는 대상을 확장하지 못한다. 미완의 시도, 수직선을 유지하는 법, 제도, 언론. 수직으로 서 있는 ‘설국열차’에는 부수고 나갈 문이 없다. 문광의 남편의 지하벙커 자리에 기택이 들어서게 되는 엔딩은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기생의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계단을 올라가도 결국 계단을 내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를 드러낸다. 때문에 <기생충>의 공간들을 ‘설국열차’를 수직으로 세운 것만 같다. 꼬리칸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를 기우가 대신하여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칠 뿐이다.

 하지만 <기생충>의 가족은 추락한다. 영화의 중반부, 이들은 비를 맞으며 박사장의 집을 빠져나온다. 폭우가 내리는 날, 카메라는 하수구를 향하는 물줄기를 보여준 뒤, 높은 지대에 있는 박사장의 집에서 기택 가족이 사는 반지하집까지의 먼 길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물이 위로 솟구치는 법은 없다. 기택 가족은 물과 함께 자신들이 반지하집으로 하강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강의 이미지 끝에는 물벼락을 맞은 동네 주민들이 집과 가게에서 허둥지둥 물을 퍼내고 있는 광경이다. 기택 가족 또한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가 건질 수 있는 물건들을 건져낸다. 이 곳에서 위로 상승하고 있는 것은 변기에서 역류해 뿜어져 나오는 오물뿐이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간 곳에서 나는 냄새, 박사장은 그 냄새가 계속해서 “선을 넘는다”라고 말한다. 기택, 기우, 기정, 충숙은 박사장이 말하는 선을 넘지 않는다. 아니, 박사장과 연교(조여정) 부부가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만 선을 넘는다. 그 ‘선’이라는 것은 굉장히 유동적이다. 선이 그어지는 지점은 오로지 박사장과 연교 가족의 자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들의 ‘선’은 그들의 ‘기분’이다. 

 다만 <기생충>이 이 지점을 비판하고 있는가, 혹은 기택 가족의 ‘직업 강탈’이 계급투쟁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지점에서는 의문점이 생긴다. <기생충>은 끊임없이 장르를 바꿔간다. 반지하집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에서 시작해, 기우이 친구(박서준)에게 받은 요청을 바탕으로 세운 계획을 통해 기정, 기택, 충숙이 차례로 박사장의 대저택으로 입장하는 하이스트 영화로 변화하고, 문광이 다시 저택에 돌아와 남편의 존재를 알리는 순간엔 호러, 박사장 일가가 폭우로 귀가한 이후엔 히치콕스러운 서스펜스, 영화의 하이라이트에 다다라서는 슬래셔가 된다. 계속되는 장르의 변화 속에서 계급의 문제는 장르적 소재로 전락한다. <살인의 추억>에서 한국의 전근대적인 면모를 드러내거나, <괴물>에서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스릴러, 괴수물, 이들을 관통하는 봉준호 스타일의 코미디 안에 녹여낸 것에 비해, <기생충>은 이들의 표면을 영화에 가져오기만 한다. 오랜만에 ‘한국영화’로 돌아온 봉준호는 이제 연대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마저 놓은 것일까? 하이스트 영화를 방불케 하는 기우와 기정의 계획과 대책 없는 기택의 무계획이 대립하는 것은, 바위를 칠 계란이라도 준비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맨주먹으로 바위를 쳐 자신부터 깨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봉준호는 기택을 지하실에 봉하고 기우에겐 냉소만을 남겨줬다. 봉준호가 한국이라는 시공간을 담던 송강호의 몸은 이제 최우식의 세대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 중이다. 그 사이에 연대는 없다. “아버지 건강하세요”는 “밥은 먹고 다니냐?”가 될 수 없고, 반지하집은 한강변의 매점이 될 수 없다. 그저 아버지에서 아들로(만) 이어지는, 무계획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계획으로 이어지는, 386세대에서 먹고사니즘의 세대로 이어지는 유산 밖에 없다. 그 유산은 계급의 문제를 절묘하게 회피하며 무기력을 동력으로 삼는 숭배와 혐오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기생충>은 이 무기력을 장르영화의 활력으로 포장하고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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