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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17. 2019

<기생충>의 수평적 풍경

<플란다스의 개>의 복도식 아파트(좌), <살인의 추억>의 기차(우)
<괴물>의 한강(좌), <마더>의 오프닝 시퀀스(우)

 돌이켜보면 봉준호의 영화들은 대부분 수평의 영화였다. <플란다스의 개>는 길게 뻗은 복도식 아파트의 풍경을 강조한다. <살인의 추억>의 기차는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도달하지 못한 시대를 향해 돌진한다. <괴물>은 한강공원의 평지를 내달리는 괴물의 모습을 버스 승객의 시점으로 보여주고, 모든 사건이 끝난 고요한 한강공원의 모습으로 끝난다. <마더>에서 엄마(김혜자)가 춤추는 들판의 풍경은 모성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드러난 불명확한 상태를 보여준다. <설국열차>의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세계를 실어 나르는 거대한 수평적 순환체계이다. 그렇다면 봉준호 영화 속 수직 이미지들은 무엇인가? 갑작스레 도달한 새로운 시대(<살인의 추억>의 채석장-공장), 과거에서 회귀한 유령적 존재의 거처(<괴물>의 거대한 하수구), 혹은 전복 그 자체(<설국열차>의 눈사태)이다. 봉준호의 수평적 풍경들에서 수직 이미지는 일종의 카운터 펀치로 작용한다.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좌), <살인의 추억>의 채석장
<괴물>의 수직 하수구(좌), <설국열차>의 눈사태(우)

 <기생충>도 이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생충>의 공간은 크게 세 곳이다. 기택(송강호) 가족의 반지하 집, 동익(이선균) 가족의 저택, 저택의 가정부인 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가 숨어 사는 지하실. 각각의 공간은 수평적 구조를 취하고, 카메라는 각 공간을 수평적으로 풍경화 한다. 반지하 집 창문으로 보이는 골목길 풍경, 저택 거실의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넓은 정원의 풍경, 기다란 복도 같은 구조인 지하실이 그것이다. 이러한 수평적 공간들은 봉준호의 전작들, 가령 복도형 아파트, 논두렁 위의 철로, 설국열차의 각 칸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기생충>에서 이 공간들을 잇는 요소는 계단이다. 기우(최우식)가 문광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위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시작해, 근세가 숨어 사는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등장하고, 동익 가족의 갑작스러운 귀가 때문에 반지하 집으로 도피하는 기택, 기우, 기정(박소담)은 무수히 많은 계단을 통해 반지하 집으로 내려간다. 수평적 공간 사이를 무수히 많은 계단을 통해 오가는 영화라고 <기생충>을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다.

동익의 저택과 계단(좌), 동익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우)

 봉준호는 <기생충>의 계단이 김기영의 <하녀>에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하녀>의 2층 양옥집의 계단은 계급 상승과 추락을 명징하게 그려내는 소재이다. <하녀>의 계단은 상승과 예정된 추락을 담아냄으로써 ‘계급’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계단’이라는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수많은 수평의 단이 쌓아 올려진 모습이다. 계단에서의 이동은 그 자체로 수직의 운동이지만, 계단이라는 이미지 자체는 수평을 내포하고 있다. <기생충>은 반지하 집부터 동익의 저택, 그 밑의 지하실에 이르는 공간들을 계단처럼 쌓아 올린 구조를 취한다. 기택의 가족은 ‘직업 하이스트’를 통해 수평으로 쌓인 공간들을 차례차례 올라간다. <기생충>은 이 계단들 또한 수평적 풍경에 편입시킨다. 영화의 대표적인 하강의 순간인 기택 가족이 저택에서 반지하 집으로 도망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세 명의 인물은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오지만, 계단들은 측면에서 촬영되어 있다. 수직이라기엔 대각선에 가까운 방향으로 하강하는 이들은 골목길, 터널 등의 공간들을 가로로 오간다. 영화에서 처음으로 계단이 강조되는, 기우가 문광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계단을 올라가는 시퀀스 또한 측면에서 촬영된 수평적 풍경에 가깝다. 계단을 정면에서 촬영하여 수직적 추락의 이미지를 강조한 <하녀>와 비교했을 때, <기생충>의 계단은 분명 다른 이미지다. 이렇게 <기생충>은 무수한 수평 이미지들로 쌓아 올려진 계단의 구조를 취한다. 

기택의 반지하집 창으로 보이는 풍경(좌), 반지하집의 창문(우)

 영화는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 창문으로 보이는 골목길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같은 풍경으로 끝난다. 카메라는 수평적 풍경이 만들어내는 수미상관 구조 사이에서 기택의 반지하 집과 동익의 저택을 오간다. 그 사이에 몇몇 수직 이미지들, 계단에서 추락하는 문광과 구정물 위로 떠오르는 산수경석이 등장한다. 전자는 같은 계급의 인물들이 서로를 추락시키려는 싸움의 일부이며, 후자는 예정된 추락으로 향하는 상승의 판타지이다. 이러한 <기생충>의 수직 이미지들은 영화 속 인물들을 수평의 풍경 안에 고정한다. 추락한 문광은 지하실에 놓이고, 산수경석으로 머리를 가격당한 기우는 반지하 집의 풍경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수미상관의 구조로 끝나지만, 마지막의 풍경 속에는 기우가 포함되어 있다. <기생충>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수평의 풍경은 봉준호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족의 해체 이후 찾아온 연대의 풍경이었던 <괴물>, 전복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생명을 가진 풍경의 <설국열차> 등과 비교하면, <기생충>의 수평적 풍경은 슬픔 혹은 냉소의 풍경이다. 이 풍경엔 새로운 시대를 감지하는 80년대 시골 형사의 얼굴도, 가족과 모성신화가 해체된 공간에 새로이 들어선 풍경도 없다. <기생충>의 수평들은 상승의 목적지에 있는 동익의 가족을 끌어내리지도 못한다. 기택에게 공격당한 동익의 몸이 뉘인 장소는 기택의 가족이 염원하던 상승된 수평적 풍경이다. <기생충>은 각각의 인물에게 그들이 위치할 수평적 공간을 지정해주고, 인물들을 그곳에 고정한다. 영화의 수직 이미지들은 이들을 고정하는데 일조한다. 이 슬픔과 냉소의 풍경은, 봉준호의 다른 풍경들이 간 적 없던 무의미로 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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