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불멸사랑]과 국립현대미술관 [불온한 데이터]
*과제로 썼던 글입니다. 두 전시 모두 현재는 종료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데이터’를 주요 주제로 한 두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하나는 일민미술관의 [불멸사랑], 다른 하나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불온한 데이터]이다. 전자는 데이터를 통한 새로운 방식의 역사쓰기를 표방하고, 후자는 데이터와 첨단기술이 새로운 방식의 예술형식, 공공재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데이터’를 어떠한 관점에서 발굴하고 사용하는지 또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은 두 전시 속 작품들에 사용된 매체 활용 방식에서 드러난다.
<불멸사랑>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새로운 역사 쓰기’를 시도한다. 전시의 포문을 여는 파비앙 베르쉐르의 작품들은 ‘미키 마우스’와 ‘배트맨’ 등으로 대표되는 팝컬쳐의 이미지들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들은 ‘아르 브뤼’에 해당하는 작품들처럼 낙서와 조잡한 조형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작품들은 ‘팝컬쳐’라는 데이터가 동시대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을 새롭게 점령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익명의 청춘들’로 명명되는 시대의 단면들을 SNS에 개재될 법한 웹툰 스타일로 그려내는 이우성의 작품들 또한 베르쉐르의 작품들과 유사점을 지닌다. 현대인의 경험은 데이터로서 SNS에 업로드되고, 그 데이터들은 다시 일상과 무의식 속으로 침투한다. 강이연의 <연속체>는 그러한 데이터에 의존하여 수학적, 기계적으로 추상화된 문제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과연 ‘데이터’라는 것의 속성을 온전히 파악하고 있는가? 이들이 다루는 ‘데이터’는 그림, 조형물, 영상설치작업 등 물리적인 형상을 통해서 다뤄진다. 이들의 작업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의 새로운 역사 쓰기’라기보단, 또 다른 데이터의 생산에 불과하다.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은 기술양식의 변화가 예술양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벤야민의 견해는 “기술양식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예술양식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예술을 수용하는 방법 자체가 변화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불멸사랑]의 작품들은 ‘새로운 기술적 토대’를 소재로 내세웠음에도, 벤야민이 말하는 변화들을 수용해내지 못한다. ‘데이터’는 손에 잡히지 않는 가상의 무엇인가로 느껴지지만, 물리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요구한다. 우리는 클라우드라고 부르는 가상의 저장소에 사진과 메모 등을 저장하지만, 그 클라우드는 지표면에 붙어 있는 물리적인 또 하나의 저장소가 필요하다. [불멸사랑]의 작품들은 이러한 ‘데이터’의 양가적인 속성을 잡아내지 못한다. 5층 신문박물관의 전시물 사이사이 회화 작품들을 ‘삽입’해둔 서용선의 작품 디스플레이 방식은 [불멸사랑]의 전시 기획이 조금은 어색한 방향성을 선택했음을 드러낸다. [불멸사랑]의 작품들은 전시장 안에서 단순하게 나열되어 있고, 반복적으로 상영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미디어-데이터 환경’에서 발굴한 이미지들은 단순히 역사 속에 ‘물리적으로 삽입’되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데이터’의 속성을 벗어난 [불멸사랑]의 이미지들은 미술관의 화이트큐브, 블랙큐브에서 기존의 역사쓰기, 기존 예술양식의 수용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은 일종의 완결된 서사 혹은 역사를 포기한다. 이곳의 작품들은 데이터의 실시간적인 흐름, 예술양식, 공공재, 혹은 역사쓰기의 도구로써 활용되고 있는 ‘데이터’에 주목한다. 때문에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은 선언문, 진행중인 프로젝트, 실시간적인 작품 제작의 과정, 공공재로써의 데이터를 활용하기 위한 로드맵 등의 형식을 취한다. 전시장 입구에 위치한 거대한 벽화인 수퍼플렉스의 <모든 데이터를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작품들을 대변한다. “모든 데이터를 사람들에게”라는 문구가 거대하게 쓰여 있는 이 작품은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이 지향하는 바를 선언한다. “데이터를 가공, 소유, 유통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가진 정보를 권력화하는 것인가”라는 [불온한 데이터]의 전시 서문 속 질문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전시를 여는 것이다.
자크 블리스의 <얼굴 무기화 세트>는 SNS는 물론 미국 국토안보부 등 정부의 안보정책에까지 폭넓게 활용되는 안면인식 기술에 대한 저항을 꾀한다. 안면인식을 통해 인종과 젠더, 성적지향은 물론 테러분자까지 걸러낼 수 있다 주장하는 권위적이며 차별적인 기술 사용법에 맞서, 안면인식 기술이 ‘퀴어’라고 분류한 이들의 얼굴 데이터들을 합쳐 제작한 ‘집단 가면’을 통해 얼굴을 무기화한다는 것이 자크 블리스의 논리이다. 하람 판 덴 도르펠의 <내포된 교환>과 <레프트 갤러리 설명자>는 작가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작품을 생성하는 과정을 설명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한 이 작품은 소프트웨어와 이를 구성하는 알고리즘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사이먼 데니의 <블록체인이란 무엇인가?> 또한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데이터 처리 기술을 통해 ‘권위를 통한 정보의 신뢰성 획득’이라는 기존의 권위적인 데이터 체제가 변화할 수 있음을 설명하는 일종의 로드맵이다. 이들 작품은 기술과 기존의 데이터 체제가 지닌 권위성을 폭로하고, 4차산업혁명의 대표적 기술들이 이를 무화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스라엘 지역 베두인족에게 가해진 폭력의 역사를 공공의 데이터를 창출해 증명하려는 포렌식 아카이브의 <지상검증자료>와 <움 알-히란에서의 살인> 또한 권위와 권력에 의해 은폐된 데이터들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공공재로서의 데이터라는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동시대의 기술적 조건을 재해석한 김웅현의 <밤의 조우>와 김실비의 <금융-신용-영성 삼신도>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크리스 쉔의 <위상공간 360>과 레이첼 아라의 <나의 값어치는 이 정도(자가 평가 예술작품): 한국버전>은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가공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쉔은 로봇 청소공의 기술적 특징을 조형화한다. 전시장 바닥에 놓인 로봇 청소공들은 내재된 소프트웨어에 의해 움직이고, 쉔은 이들의 움직임을 기록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조형화한다. 로봇 청소공들이 그린 궤적들은 전시장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조형화되며, 이들의 궤적은 무작위와 물리학적 궤도 어딘가에 위치한 다양한 조합의 무늬들을 생성한다. 아라의 작업은 SNS, 작품 거래 사이트, 웹카메라가 집계한 관람객 수 등을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작품값을 네온사인으로 나타낸다. 이 작품은 데이터의 실시간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데이터가 저장되고 처리되는 하드웨어를 전시장 한구석에 그대로 배치함으로써 데이터의 양가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데이터’는 어째서 불온한가?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은 권위에 의한 데이터의 흐름을 거부하고, 새로운 데이터의 활용법, 공공재로서의 데이터,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반응, 권위가 은폐하는 데이터의 속성에 대한 폭로 등을 목표로 삼는다. 기존의 권위가 이끌어온 ‘온건한’ 데이터는 자신의 위치에서 역사 속에 편입되길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불온한’ 데이터들은 ‘역사 되기’의 방법론을 채택한다. 벤야민이 말한 ‘예술의 정치화’는 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새로운 데이터 기술, 흐름, 그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은 역사를 다시 쓰거나 역사에 편입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그들 자체로 역사가 될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들이 수용한 새로운 기술은, 데이터가 그러하듯, 실시간적으로 작품에 수용된다. 그렇기에 ‘유물론 변증법에 의한 역사되기’는 [불온한 데이터]의 작품들이 수행하고 있는, 그리고 아쉽게도 [불멸사랑]의 작품들이 해내지 못한 성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