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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Aug 23. 2019

슈퍼히어로 장르 속 팝컬처 레퍼런스에 대한 의문

<더 보이즈>와 스파이더맨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오리지널 컨텐츠로 공개된 슈퍼히어로 드라마 <더 보이즈>의 1화에선 워쇼스키 자매의 출세작 <매트릭스>가 언급된다. 물론 휴이(잭 퀘이드)가 빌리(칼 어번)에게 “당신은 <매트릭스>의 포르노 버전에 나올 것처럼 생겼어요”라는 실없는 대사 속에서 언급되는 것이지만, <더 보이즈>의 세계관 속에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슈퍼히어로를 팝컬처의 아이콘처럼 다루는 드라마이기에, 당연하게도 <더 보이즈> 속에는 다양한 영화, 드라마, 뮤지션, TV쇼 등이 언급된다. 그럼에도 <매트릭스>에 대한 언급은 어딘가 흥미롭다. 초능력을 지닌 이들이 일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슈퍼히어로가 할리우드 스타의 위치에 있는 이 세계관에서, 과연 <매트릭스>는 존재할 수 있는 작품인가?

 <더 보이즈>의 첫 시즌을 감상한 지는 1, 2주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위의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우연하게 접한 어떤 밈이었다. “언제까지 피터가 스타워즈를 좋아하면서도 닉 퓨리가 메이스 윈두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겁니까? (Are we gonna ignore the fact that Peter loves Star Wars but doesn't realise that Nick Fury is Mace Windu?)”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속 스파이더맨-피터 파커(톰 홀랜드)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등의 작품에서 <스타워즈>를 언급한 것에 대한 농담이다. 닉 퓨리를 연기하는 사무엘 L. 잭슨은 1999년부터 2005년에 걸쳐 개봉한 <스타워즈> 프리퀄 트릴로지에 메이스 윈드 역으로 출연했었다. 영화 밖의 시간을 거의 실시간으로 쫓아가는 MCU의 성격 상, 2008년 <아이언맨> 이전의 사건들은 대부분 MCU 세계관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물론 <캡틴 마블>이나 <퍼스트 어벤저>처럼 2008년 이전의 시간대를 다룬 예외들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스타워즈> 클래식 트릴로지가 존재하는(극 중 <제국의 역습>이라는 제목이 언급되기도 한다) 세계관 이기에, 1999~2005년 사이에 개봉한 프리퀄 트릴로지가 MCU 세계관 안에 존재한다는 가정은 어느 정도 신빙성을 얻는다. 물론 <깨어난 포스>부터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에 이르는 시퀄 트릴로지와 스핀오프 작품들이 MCU 세계관 내에서 존재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때문에 절친인 네드(제이콥 베덜런)와 함께 ‘데스 스타’ 레고를 조립하는 약속을 잡을 정도로 팬인 피터 파커가 프리퀄 트릴로지를 보지 않았을 리는 없다.

 사실 MCU는 이러한 문제들을 계속 품고 있었다. MCU 이전의 작품들에서 배우들의 출연작이 겹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마리사 토메이가 함께 출연했던 <온리 유>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경우 해결책은 간단하다. 애초에 없던 영화인 척 언급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들에선 다양한 영화들이 언급된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는 <풋루즈>나 <에이리언>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사랑의 블랙홀>부터 <터미네이터>, <빽 투 더 퓨처> 등의 시간여행 소재 영화들이 대거 언급된다. <데드풀>은 그야말로 팝컬처 레퍼런스로 범벅이 된 작품이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슈퍼히어로는 등장과 함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다. MCU에선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 이후 아이언맨을 필두로 한 어벤져스 멤버들은 일종의 팝스타가 되었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에서는 스파이더맨(토비 맥과이어)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온갖 코스튬과 가면 등이 대중들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는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애니메이션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도 등장한다. DC 필름 유니버스(이하 DCFU)의 <샤잠!>에선 이러한 슈퍼히어로 ‘굿즈’들이 적극적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프레디(잭 딜런 그레인저)는 슈퍼히어로 ‘덕후’이며, 아쿠아맨, 원더우먼, 배트맨, 슈퍼맨 등의 로고를 본떠 제작된 스냅백, 티셔츠, 가방 등이 등장한다. 엑스맨의 <로건>에서는 엑스맨 코믹스가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정도 가능할 것이다. “슈퍼히어로가 대중문화 아이콘이 된 세계관이라면, 그 슈퍼히어로들이 출연한, 혹은 이들을 소재로 삼은 영화, TV쇼, 노래 등이 제작되지 않을까?”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의 드라마 <더 보이즈>는 이러한 가정을 활용한 작품이다. DC의 ‘저스티스 리그’ 캐릭터들을 패러디한 <더 보이즈>의 ‘더 세븐’은 성공한 밴드를 보는 것만 같다. 각각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 플래시, 아쿠아맨 등을 패러디한 홈랜더(안토니 스타), 퀸 메이브(도미니크 맥켈리것), 에이-트레인(제시 어셔), 블랙 누아르(나단 미첼), 더 딥(체이스 크로퍼드)이 ‘더 세븐’의 멤버이며, 여기에 투명인간인 트랜스루센트(알렉스 하셀)가 추가로 속해있다. <더 보이즈>는 여기에 새로운 멤버인 ‘스타라이트’ 애니(에린 모리아티)가 합류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언뜻 보기에 ‘더 세븐’은 모티프로 삼은 ‘저스티스 리그’나 마블의 ‘어벤져스’와 같은 팀 정도로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또 하나의 설정이 추가되어 있다. 바로 ‘더 세븐’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회사 ‘보우트’이다. 보우트는 더 세븐을 일종의 아이돌 그룹처럼 관리한다. 자본을 활용해 이들이 저지른 실수나 악행을 무마하려 하기도 하고,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나 TV쇼를 제작하기도 하며, 피규어와 코스튬을 비롯한 각종 굿즈를 생산해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이 세계관 속 타임스퀘어는 더 세븐이 출연한 영화나 광고로 도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세계관에서 더 세븐은 비틀즈이자 원 디렉션이며, 데스티니 차일드이자 방탄소년단인 셈이다. 

 <더 보이즈>는 에피소드 6을 통해 이들이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더 세븐이 어떻게 슈퍼히어로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이들의 생애와 일상을 기반으로 촬영한 영상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북미의 리얼리티 쇼 형식을 차용한 듯한 이 영상들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프로파간다 필름을 방불케 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완성된 영상을 보여주는 대신 촬영과정을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완벽하게 관리된 모습만을 대중들에게 내보이는 스타들의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가령, 사이코패스 성향의 홈랜더가 사소한 이유로 촬영 중 벌컥 화를 내는 장면이 메이킹 필름에 담긴 것처럼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는 자본에 의해 관리되는 슈퍼히어로들이 자신들의 이미지 메이킹을 매니지먼트 회사인 보우트에 의탁하고 있음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준다. 사실 시청자들은 <더 보이즈>의 첫 에피소드에서 휴이의 애인이 질주하는 에이-트레인과 충돌해 문자 그대로 몸이 터져 사망하고, 보우트가 돈으로 휴이를 입막음하려 했음을 알고 있다. 홈랜더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초능력을 활용하여 비행기를 격추시키거나, 추락하는 비행기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귀찮음을 이유로 구하지 않은 장면 또한 이미 보았다. 더 딥이 더 세븐에 새롭게 합류한 애니를 성추행하는 장면은 시즌 초반부에서부터 등장하며, 더 세븐 회의에서 트랜스루센트나 블랙 누아르의 언행은 자신들의 이미지와 수익 관리에만 치중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슈퍼히어로’라는 이미지를 판매하는 스타일뿐, 슈퍼히어로로써 활동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들의 활동은 보우트와의 계약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며, 애인을 잃은 휴이의 반발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우연한 사고일 뿐이다. 이들은 대중문화 아이콘으로써의 자신들의 이미지를 유지시키는 것에 전념할 뿐이다.

 여기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슈퍼히어로들이 대중문화 아이콘이 된 세계관에서, <매트릭스>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 작품인가? 물론 <매트릭스>가 품고 있는 주제의식은 고스란히 유지될 것이다. 초능력자들이 지구를 수호하는 세계관에서도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공포는 여전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과연 <매트릭스>가 <더 보이즈> 밖에 존재하는, 시청자들이 익숙히 알고 있을 그 형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더 보이즈>는 MCU처럼 슈퍼히어로들이 가시화된 시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이미 슈퍼히어로의 존재가 명확하게 인지되어 있는 세계를 가정하고, 이 가정을 기반으로 세계관이 작동한다. 슈퍼히어로들을 지칭하는 멸칭인 ‘숩(Supe)’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슈퍼히어로들이 활동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슈퍼히어로들이 괴력을 사용하고, 초음속으로 달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와 같은 히어로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네오의 초능력이 ‘매트릭스’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그와 유사한, 그리고 더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이들이 영화관 밖에서 활보하고 있음에도 네오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질 이유는 무엇인가? 말하자면, <더 보이즈>의 세계관은 드라마 밖 현실에 슈퍼히어로를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첨가했을 뿐, 이들이 대중문화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왔는지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셈이다.

 이것은 MCU의 피터 파커가 메이스 윈두를 연기했던 사무엘 L. 잭슨이 닉 퓨리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의 오류이다. 영화 속 대중문화 레퍼런스는 극 중 세계관과 영화 밖 관객들의 세계와 접점을 만들어냄으로써 관객과 캐릭터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는 요소로 사용되어 왔다. 팝 음악부터 다양한 영화와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언급하는 <데드풀>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영화의 세계관과 영화 밖 세계가 충돌하지 않을 때 성립한다. <더 보이즈>에서 언급되는 <매트릭스>나 MCU의 <스타워즈> 언급은 이러한 충돌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특히 <더 보이즈>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을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큰 틀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정재계와의 유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레퍼런스로 언급하는 영화와 슈퍼히어로의 존재는 작품의 고려대상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작품 내 세계관과 작품 밖 세계의 접점이 되기보다는, 되려 두 세계를 충돌시킨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소하게 언급되고 넘어가는 농담에 딴지는 거는 것이기도 하다. 휴이가 언급하는 것은 <매트릭스> 속 캐릭터들의 외피이지 네오의 초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매트릭스>와는 다른 버전의 <매트릭스>가 <더 보이즈>의 세계관 안에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사 속에서 레퍼런스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위화감은 피해 갈 수 없다. 

 <더 보이즈>는 이제 막 첫 시즌이 공개되었을 뿐이고, 원작 코믹스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 느껴지는 위화감은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혹은 원작 코믹스를 감상하면서 해결될 수 있는 지점일 수도 있다. 지금 떠오르는 바람은 <더 보이즈> 안에서 슈퍼히어로들의 존재로 인해 변형된 영화 밖의 영화, 팝 음악, TV쇼 등을 접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극 중 휴이는 뮤지션 빌리 조엘과 사이먼 앤 가펑클의 팬이다. 여기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슈퍼히어로의 등장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빌리 조엘과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라는 의문이다. 만약 <더 보이즈> 세계관 버전의 <매트릭스>가 있다면 그것이 궁금하고, MCU 버전의 <스타워즈> 프리퀄 트릴로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궁금하다. 이 세계관 버전의 빌리 조엘이 있다면, 그의 음악 또한 궁금하다. 작품 안과 밖의 세계는 분명 다르다. 작품밖에 존재하는 팝컬처 레퍼런스들이 작품 안에 동일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세계관 자체를 ‘여기까지만’ 보여주겠다는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보이즈>의 다음 시즌에서 보고 싶은 것이 이러한 것들이다. 슈퍼히어로들이 대중문화 아이콘이라면, 그들을 활용한 굿즈 정도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들의 존재로 인해 재구성된 팝컬처의 모습들. 단편적인 모습들일지라도, 그러한 요소들이 시리즈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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