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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게 섞었는데, 마시면 들어가는 폭탄주

올해의 문제작,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by 영화평론가 박동수

*스포일러 주의

경상도 대산시(임의의 지명)에서 국회의원 선거유세를 앞두고 있는 김종찬(김주혁)과 그의 아내 김연홍(손예진). 정신없는 선거유세 첫날 그들의 딸 김민진(신지훈)이 실종된다. 이전에도 가출했던 경력이 있었던 민진이기에 선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종찬과 딸에게 무슨일이라도 생기면 책임질 거냐는 연홍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연홍은 민진을 찾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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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홍당무>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던 이경미 감독이 8년 만에 돌아왔다. 장르를 종잡을 수 없는 이경미 감독의 새로운 영화 <비밀은 없다>는 정치 스릴러로 시작해 블랙 코미디, 치정극, 병맛유머, 퀴어 등 다양한 장르들을 가로지르며 반전까지 집어넣는다. 마치 더럽게 섞었는데 마시면 들어가는 폭탄주 같다. 그렇다고 박찬욱 감독처럼 장르를 ‘이경미’라고 하기는 어딘가 부족하다. 지금 나오는 보이스오버가 어느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대사인지 헷갈릴 정도의 많은 보이스오버, 길게 늘어지는 디졸브와 화면분할 등은 이경미 <미쓰 홍당무>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그만의 스타일이다. 하지만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 플래시백 장면에서 사용된 슬로모션 등은 이경미 감독의 스승 박찬욱 감독이나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갈증>의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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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경미 감독이 박찬욱 감독과 다른 점이라면, 박찬욱의 영화엔 지역성이 고의적으로 결여되어있는 반면, 이경미 감독의 영화에는 배경이 한국이기에 드러나는 설정들이 많다는 것이다. 경상도 대산시(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대구)를 배경으로 기호 1번의 한국당(파란 색이지만 누가 봐도 새누리당)과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나온 노재순 후보(김의성)의 모습은 지난 4월의 한국을 그대로 따온 듯하다. 종찬의 참모진들이 전라도 출신 연홍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역혐오와 여성혐오적인 대사도 등장하고, 관객들의 정치혐오를 유도라도 하듯이 더러운 정치인들의 행각을 전시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연홍을 집어넣고 관찰하듯 영화를 만든다.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은 온갖 자극과 더러움, 혐오, 분노,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인 연홍의 뇌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질적인 영화음악과 이경미 감독의 스타일로 굳어진 과도한 보이스오버, 디졸브를 과용한 느낌의 편집까지 납득이 간다. 결국 이경미 감독은 온갖 혐오와 분노들이 가득한 한국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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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박찬욱과 나카시마 테츠야를 언급하면서 이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비밀은 없다>가 대단하다고 느낀 점은 근친상간, 학생의 유우에 에이즈 양성판정의 피를 주하는 선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는 점이다. 보통 상업영화의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윤리적 타협선 위로 관객들의 뇌를 축구공처럼 차서 올린다. 마치 중고등학생들이 조절 못하고 학교 담벼락 바깥으로 공을 차 넘기는 것 같다. 얽히고 얽히는 사건 사이에서 복수와 폭로와 욕심을 위해 서로의 치부를 거침없이 공격하는 광경은 윤리성을 벗어난 듯하면서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경미 감독이 원한 것은 이런 불편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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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의 연기에 대해서도 영화 전체에 대한 것만큼이나 호불호가 갈린다. 전체적으로 잘 해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사투리 연기는 아쉽다. 사실 송강호 수준의 사투리 복사기이거나 현지 출신이 아닌 이상 사투리 연기를 완벽하게 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손예진의 전라도 사투리와 김주혁의 경상도 사투리 모두 많이 나오진 않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아쉬웠다. 민진역의 신지훈과 미옥역의 김소희, 손소라역의 최유화는 의외의 발견이다. 신지훈은 <K-팝 스타 시즌3>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고, 당시에 그 프로그램을 즐겨 봤음에도 신지훈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 변신이었다. 최유화는 무난할 수도 있는 역할이었지만 시선을 끌어들이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김소희가 <비밀은 없다>의 최대 발견인데, 다음 연기와 작품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f(x)의 엠버를 떠올리게 만드는 중성적인 매력이 있고,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같은 호러 영화에서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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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돌아온 이경미 감독이기에 다음 영화가 언제 나올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비밀은 없다>가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획일화된 기획영화가 판치는 잔잔한 고인 물 같은 한국 상업영화계에 파장을 일으킬 돌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제발 이런 재밌는 시도들에 간단히 ‘핵노잼’이라는 딱지를 붙여 가치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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