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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박동수 Jan 16. 2020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기억하기

<작은 빛> 조민재 2018

 뇌수술을 앞둔 진무(곽진무)는 수술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캠코더를 구입해 이것저것 촬영한다. 그의 촬영 대상은 가족. 나름 복잡한 가족사를 가진 가족이기에 이들이 한데 모이는 것부터 각자의 이해관계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다르다. 진무는 어머니를 시작으로 누나, 이복형 등을 만나고, 이들을 캠코더에 담는다. 그 과정에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서울독립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독립영화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작은 빛>은 가족을 다룬 작품이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가족 드라마로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따라가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리듬은 잔잔하지만, 캠코더로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담는 진무의 행동은 발버둥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진무의 가족관계가 하나씩 밝혀진다. 이들은 ‘아버지’라는 공통분모로 묶인다. 진무와 누나는 아버지의 자녀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내였고, 이복 형도 아버지의 자녀이다. 진무가 처음 찾아가는 가족은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낡은 방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하지만 가족이 함께 촬영된 사진은 없다. 각자의 얼굴이 촬영된 사진이 조금은 산만하게 걸려 있을 뿐이다. 연락조차 서로 잘 주고받지 않는 이들을 가족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시키는 것은 오래전에 사망한 과거, 즉 아버지이다. 가족들은 땅에 파묻힌 아버지의 관에 나무뿌리가 들어와 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어딘가 뒤숭숭해한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틀을 만들어낸 근원임과 동시에 가족을 해체한 계기이다. 땅속에 파묻힌 아버지는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이거나 회피의 대상이다. 진무는 캠코더로 가족들을 촬영함으로써 흩어져 있는 이들을 별자리처럼 잇는다. 캠코더의 빛, 점멸하는 형광등 사이로 드러나는 각 가족들의 식사 장면, 방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는 아버지의 카메라 플래시는 가족이나 아버지라는 희미한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작은 빛>이 아버지라는 과거와의 화해나 가족들의 봉합을 테마로 삼은 작품은 아니다. 이미 흩어진 가족은 다시금 재결합될 수 없다. 미봉책에 가까운 봉합 대신 영화가 선택한 길은 청산이다. 영화 후반부, 드디어 모두 모인 가족은 아버지의 무덤을 파내 이장하려 한다. 관을 뚫고 들어온 나무뿌리와 함께, 그 뿌리에 뒤섞인 것 마냥 20여 년의 세월 동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시신이 드러난다. 시신을 보고 인부들은 손사래를 치며 산 밑으로 내려가지만, 진무는 덤덤하게 시신을 수습하고 상자에 담아 옮긴다. 아버지를 뿌리에서 분리해 다른 곳으로, 축축한 땅에서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는 이 과정은 아버지에 대한 긍정이나 화해의 순간이 아닌 청산의 순간이다. 가정폭력을 일삼다가 일찍 죽어버린 아버지는 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그가 가족을 형성하는 것의 근원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그 찝찝한 근원을 회피하거나 방치하는 대신, 그것을 파내고 청산한다. 

 진무가 캠코더로 가족들을 찍는 행위는 과거로 향하는 지금을 붙잡아 두려는 발버둥이다. 기억을 잃을지도 모르는 그가 기억이나 회상에서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캠코더로 지금을 기록하는 행위는 아버지에 대한 청산과 공명한다. 진무는 캠코더로 촬영한 내용을 가족들과 함께 본다. 캠코더를 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작은 빛으로 과거를 보는 것은, 형상이 남아 있는 시신을 파내어 밝은 곳으로 들고 간 뒤 다시 파묻는 이장의 행위와 유사하다. 진무는 과거를 붙잡아 현재에 머물게 하려고 캠코더를 든다. 그 과정 속에서 이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붙잡을 수 없는 과거를 청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과거는 진무의 캠코더에 담긴 아버지의 카메라 속 사진들 정도만으로도 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주 잠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얼굴들이라는 희미한 형상들을 비추는 작은 빛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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